[밴마철] 칸트를 좀 이해하기 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agape에 대해 좀 알아 보려고 합니다. 그전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철학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존의 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만 있는 것이지 그것이 정답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dogma가 되어 인간을 그 도그마의 사상의 감옥에 빠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점에서 철학과 종교는 다릅니다. 종교는 어떤 교리를 도그마 형태로 받아드려 그것을 진리라고 믿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철학은 그런 도그마가 심리조작 가스라이팅 생각의 감옥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당연히 답이 없는 것이지요. 칸트를 하고 있지만 칸트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보다 더 진잔되고 매력적이지만 그것아 정답은 아닙니다. 거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상체계로 헤겔이 나오게 되지만 그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과정의 연속을 구경하면서 자기에개 흥미로운 것을 좀 더 자세히 드려다 보려는 것이 소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승불교는 종교보다 철학에 가까운 점이 있습니다. 모든 언어적 말해지는 진리를 속제라고 하고 진제는 공이 됩니다. 이 말의 뜻은 모든 언어적 진리는 공으로 무화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고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과정만 있다는 것이지요. 성급하게 공을 깨달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 또한 도그마가 되고 맙니다. 답은 없고 기존의 답이이라는 것들을 비판하며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과정만 있다는 것이 언뜻보면 허무주의로 버일 수 있지만 기존의 틀을 깨려고 하는 치열함이 그 허무주의를 잊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니이체는 이것을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했습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어짜피 답이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제 논의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제 논의는 단지 참고사항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에 의해 자기의 견해를 한번 가져보는 것입니다, 그 견해는 일시적인 것이고 다음의 것에 의해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을 지더라도. ….
제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던 사람은 마테오리치입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 서양사상과 중국사상을 비교하고 절충점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 매력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언제 한번 자세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유교와 천주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애인여기愛人如己라고 했습니다, 너무 멋진 번역입니다.,사랑하다는 애 다른 사람을 뜻하는 인 같다는 뜻의 여 자기라는 기 로 훌륭한 조합의 사자성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공자도 어질다는 인仁을 애인이라고 논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주교의 agape와 유교의 仁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지점에서 저는 매력을 느껴써 아가페에 대해 좀 공부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기독교에 그렇게 아가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아가페에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 그래도 아가페에 대해 전문적으로 깊게 연구한 사람이 니그렌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에로스와 아가폐라는 책을 써서 이 문제를 가장 깊이 다룬 사람입니다.
[Michelle] 멀리서, 노느라 바뻐서, 안선생님 올려주시는 글들을 게으르게 읽고 있습니다. ^^;;
강은희씨가 안선생님의 재미나게 올려주시는 강의를 함께 공부하길 원해서 초대했습니다.
[Kang]
초대 감사합니다~~~
[밴마철]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어서 위의 문제에 대해 하나 더 언급하고 아가페 이야기 하겠습니다. 주자는 젊었을 때 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다 그 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리학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허무주의였습니다. 불교적으로 본다면 진리라는 답은 없고 끊임없이 그 답을 찾아 한 평생을 허비하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편하게 의지하고 쉴 수 있는 편안안 집을 건설해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 편안안 집이 결국 도그마가 되어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심리조작 생각의 감옥으로 이끈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양명학이 나타난 것입니다.
강 선생님 환대합니다. 미셀 선생님 제가 오늘한 분량만이라도 강선생님에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강선생님이 맥락있는 이해가 될 것 같아서…
비판적 생각을 멈추고 진리라는 집에서 편히 쉬려고 하면 그것이 도그마가 되어 생각의 감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풍의 길은 끝이 없는 것이고 그 끝이 없는 길을 가는 것만 있는 것이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면 그것은 도그마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페와 유교의 인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좀 깊이 드러가 보면 그것이 서로 다릅니다, 아가페는 원래 그리스어 philia에서 온 것입니다. 그 필리아라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friendship입니다. 반면에 유교의 인은 가족관계에서 있는 자연스러운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공자는 솔직하다 정직하다 바르다는 뜻을 갖는 직(直)를 부모나 자식의 염소 도둑질을 숨겨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족간의 공감의식이 인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제새끼 제일주의라는 약점이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는 가족을 떠나 그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런 와증에 가족들이 찾아와 예수를 보기를 청했습니다, 그것을 제자가 와서 예수에게 알려주자 예수는 여기있는 여러 분이 내 형제자매이지 나에게 또 다른 형제자매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유교는 가족들의 혈연적 유대감이 바로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회라는 같은 공동체에서 속하는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서양이 크게 달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아가페의 근거가 되는 philia를 아리스터텔레스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두 사람의 몸은 서로 다르지만 지향하는 뜻을 한 곳으로 모우는 것이 필리아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예수가 agape로 해석하여 자신의 추종자를 결합의 근거로 말한 것이고 이 논리에 의해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갓잊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완잔히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유교에서도 가족관계가 기본이 되지만 붕유유신이라고 친구관계를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심이 어디에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칸트하다가 약간 다른 길로 샜지만 칸트가 말한 모든 사람을 똑 같이 대한다는 보편타당하다는 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 문제를 하고 있다는 것은 염두하면서 글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많이 했으니 진도는 여기까지 하고 혹시 질문이나 의견 있으시면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AEG3QP2sRkg&si=gOn-MLC0P84VAMac
이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서 올립니다. 끝이 없는 길이라는 것이 진제입니다. 언어적 수단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지만 가까이 가면 저 만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끝없는 길에서 길을 걷는 것만 있는 셈입니다. 그것에 지쳐서 편히 쉴 진리의 집을 찾으면 그것이 역시 언어의 집이기 때문에 자기를 갓 라이팅하는 감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운 사람끼리 그리워하면 무슨 문제가 나타날까요? 자기편만 옳다는 그런 것에 빠지지요. 칸트가 보편타당성을 이야기하는 것. 개신교에서 네 이웃을 똑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이웃사랑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에 기반하여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전히 머리 속 이성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들이 논의의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의 부정신학도 이런 것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이라고 언어적 수단으로 가까이 가보면 그 하느님은 저 만큼 멀어져 버린다는 것이지요.
[밴마철] Reply to [Haerim Lee]
이 선생님 훅시 ubc 도서관 한번 이용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UBC asian 도서관 2층에 한국도서관이 있습니다. 거기서 최인호 길없는 길 한번 빌려서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이 책은 송나라 때 고승전이라고 하여 선불교 이야기를 쓴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셔도 선블교에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 선학의 황금시대라는 책이 있는데 오웅경이라는 대만 사람이 쓴 것입니다, the golden age of zen 이라는 영어로 된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을 토머스 머튼이라는 캐톨릭 봉쇄수도원 원장을 지낸 토머스 머튼이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내용은 길없는 길과 거의 유사합니다. 원하시면 언제 만날 기회에 빌려 드리겠습니다. 혹시 길없는 길 가지고 계신 분 있으면 이혜림 선생님에게 빌려 주면 더 좋고요.
UBC 도서관 일반인도 가입비 좀 내면 도서관 이용 카드 만들 수 있습니다. 한국책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안 가봐서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Jack Shin] 황금률과 아가페 사랑을 읽으면서 좀 허무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네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글을 보면서 감동에 젖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공리주의자와 실존주의자가 된 입장에서 보면 참 허황된 글입니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진정 실천할 수 있을까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고 그렇게 대접받는 게 얼마나 될까요. 글과 문학적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내용이지요. 나쁘게 말하면 하나마나한 글입니다.ㅎㅎ
실존적 현실주의자에게 와닿는 말은... 열번에 한번은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끔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하...
이것이 저에게는 좀 더 실천적으로 들립니다. ㅎㅎ
[Haerim Lee] Reply to 밴마철
기회되면 the golden age of zen이나 빌려주세요. ubc는 멀어서 않다닙니다. 근데 영어=> 중국어=> 한국어
번역을 2번 거쳤네요.
SFU가 지척인데 그 곳마저도 않가본지가 10년은 된 듯. UBC도서관이 훨 나은데. 젊어서는 제 남편이 북한에 관한 책본다고 하여 가끔 갔었는데요. 엄청 바뀌었을 듯 합니다.
[Haerim Lee] Reply to [Jack Shin]
만일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열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매번 시도하여 한번 성공하면 성공률 10%
열번의 기회에 딱 한번만 시도하면 성공률은 1%로 떨어질테니까요.
ㅎㅎ
[밴마철] 선생님들 공부 엄청 열심히 하시네요. 바로 이 문제가 칸트철학의 약점입니다. 머리 속 이성으로는 네 이웃을 사람하라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되도록 하라 이런 말들이 머리 속에서 추론되는 과정인 이성에서는 백번 천번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실질로는 가슴속에 내켜하는 감정의 기분이 자르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따라주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더 나아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기가 딱 좋습니다. 그리하여 진정성이라는 문제가 대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