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오전 5:28] 예 좀 천천히 하고 오탈자도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중심주제는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맥락을 놓치면 따라가기 힘드니 집중해 주시고 곁가지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그냥 넘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밴마철] [오전 6:06] 귀납 추론(歸納推論,induction) 또는 귀납법(歸納法)에 대하여 좀 하겠습니다. 한자로 하면 돌아가다는 뜻 귀와 모아서 거두어 드린다는 납입니다. 관측 실험의 자료를 모아 결론에 이른다는 그런 뜻입니다. A라는 사람이 담배를 피웠는데 폐암에 걸린 것이 관측되었다. B라는 사람도 담배를 피웠는데 페암에 걸렸다. C 라는 사람도 D라는 사람도 E F….이런 것을 관측하여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개별 사례들을 보고 거기서 반복되는 어떤 규칙을 보고 원인과 결론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연 담배피운 모든 사람은 페암에 걸린다고 결론을 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담배피운 모든 사람을 관측해 본 것은 아니니까요. 만약에 실제로 다 조사해 본다면 어떤 확률적 개연성probability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뜻은 담배를 피운다는 원인과 페암에 걸린다는 결론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는 있을 지라고 인과적 필연성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좀 더 나아가 말하면 자연자체는 필연적 인과성이 없는데 반복되는 실험과 관측을 통하여 우리 머리 속의 생각들(관념)이 어떤 규칙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화라고 합니다, A B C D 등의 몇개의 사례를 보고 담배피우는 모든 사람은 페암에 걸린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말이 옳다고 볼 수는 없지요 분명 담배를 피움애도 불구하고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귀납법은 일반화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 일반화에는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흄을 비롯한 경험론자는 귀납적 추론을 통해 지식이 얻어진다고 보는데 그 지식에는 반드시 오류가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00% 지식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100% 지식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회의론자skepticism 이라고 합니다. 연역추론을 사용하여 100%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100% 지식과 100%는 없다는 사람들이 다투니 이들을 정합하려는 사람이 나타나겠지요. 그것이 칸트이고 그 중심 논리가 선험적 종합판단입니다.
[밴마철] [오전 6:25] 좀 다른 사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가지요. 오늘 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그랬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그렇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지난 번 레셀의 칠면조 이야기입니다, 종을 치면 칠면조가 모여는드는 것은 반복적 습관이고 이 반복적 습관에 의하여 칠면조는 그의 머리 속에 종소리라는 원인과 모이라는 결과를 필연적인 것처럼 어떤 규칙을 만드는데 어느 날 주인 종을 쳐서 칠면조가 모이면 그 목을 비틀어 죽여 크리마스 파티에 칠면조 구이로 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연자체에 인과적 필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반복된 습관에 의하여 우리 머리 속 생각들(관념)들이 연합해서 마치 필연적 규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논리적으로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까지 해가 동쪽에서 떳지만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우주에 어떤 충돌이 일어나서 내일은 해가 동쩍에서 뜨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과학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31] 과학도 못 믿는데 종교적 교리나 성인의 말씀 같은 것을 믿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이런 것들은 검증을 해 보지 않고 어떤 권위에 호소하여 진리를 말하는 것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합니다, 일반화의 오류와 더불어 경험론자들이 배척하려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54] 순환논증오류라고 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좀 어려우니 패스하실 분은 패스해도 좋습니다. A라는 물건을 떨어뜨리니 밑으로 떨어진다. B 도 그렇고 C 도 그렇고 …..그리하여 모든 물체는 낙하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도 일반화의 오류는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물건을 떨어뜨려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고 검증하기는 불가능한 것잊니다. 여기에는 이런 일반화의 오류 대신에 순환논증오류라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물체는 낙하한다는 것에는 그 대전제로 자연에 어떤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의 제일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여러 물건을 떨어뜨려 보고 모든 물체는 낙하한다는 규칙성을 찾아 냅니다. 자연의 제일성은 개별적 사믈의 규칙성이 의존하고 그 개별적 규칙성은 다시 자연의 제일성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마치 체바퀴 돌아가듯이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ㄹ 개별적
[밴마철] [오전 7:00] 순환논증의 오류의 예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럴게 말했다고 하면 신에 의존하여 성경이 있고 또 성경에 의존하여 신이 있는 셈이 됩니다. 신과 성경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순환논증의 오류입니다.
[밴마철] [오전 7:09] 이런 경험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꼬장꼬장함이 연상되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흄은 매우 유쾌 쾌활하고 유머 좋아하고 사람도 좋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했지만 아담 스미스가 좋아하며 따르고 또 올라버 삭스는 흄을 가장 존경하여 그렇게 살았으면 바램으로 그의 유언장과 같은 마지막 편지에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열린태도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앎으로 자기의 바운더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닫힌 것을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밴마철] [오전 7:18] https://m.blog.naver.com/boothebeige/221042944919
올리버색스, 고맙습니다.
서평 x, 개인적인 독후감.이 책은 코엑스에 있는 스타필드 별마당 도서관에서 읽은 책으로, 그냥 회사...
blog.naver.com
[밴마철] [오전 7:21] 예전에 전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기 힘드네요. 예전에 올려서 기존에 공부해 온 분들은 다 아는 것이지만 새로오신 분들을 위해 올려 보았습니다, 지금 다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흄의 철학이 꼬질꼬질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울려 보았습니다.
[hwangjisook] [오전 7:29] 안선생님
오늘 아침에 올라온 글 다 잘 읽었습니다.
맨마지막에 올라온 Oliver sacks 의 나의 생애 에세이는 다시 읽어도 뭉클해옵니다.
좋은 글
가슴에 와 닿아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과 만나며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밴마철] [오전 7:50] 예 저도 다시 보니 새로운 감동이 있습니다. 특히 다음 구절에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남들의 인생도 경험했다 승리와 비극을 호황과 불황을 혁명과 전쟁을 위대한 성취와 깊은 모호함을 목격했다 거창한 이론이 생겨났다가 완강하게 버티는 사실들에 못 이겨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덧없는 것을 좀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아마도 아름다움까지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된다.
[밴마철] [오전 7:53] 우리의 소풍 이야기와 너무 닮은 것 같습니다. 거창한 이론들이 생겼다가 꼬꾸라지는 모습.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흄은 아무리 가창한 이론이라도 100%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밴마철] [오전 7:54] 가창한—거창한.
[밴마철] [오전 7:58] https://images.app.goo.gl/EvzeHWHodNpPbvG58
제목: On the Move: A Life by Oliver Sacks review – road stories of an ...
Google에서 검색된 theguardian.com 이미지
www.google.ca
[밴마철] [오전 7:59] 격정적으로 오토바이타면서 자유의 바람에 휘날리는 우리 공부방 누군가가 연상됩니다.
[Jack Shin] [오전 10:14] 예전에 논어의 성의 정심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격물치지가 귀납법을 이용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가...
주희가 그것을 성현의 말들인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론으로 해석했다는 말을 듣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귀납법을 연역법으로 바꾼 위대한 사기꾼이 성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사실...조크죠 ㅎㅎㅎ
[Jack Shin] [오전 10:22] 흄은 경험론자라서 합리론이나 이데아를 배척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과학 조차도 개연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정시키는데...
불가론자처럼 이해되기도 합니다..
[밴마철] [오전 11:04] 예 맞는 말씀입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격은 이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격물은 사물에 이르다는 뜻입니다. 치지에서 치는 완성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치지는 앎을 이루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합하여 말하면 격물치지는 사물에 나아가서 이치를 탐구하여 앎을 이루어 나간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격물치지는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관찰 실험을 통하여 지식을 쌓아간다는 뜻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내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리학은 인간과 사물에 모두에 그 본성의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본성의 이치라는 것이 자연과학적 이치라기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 규범 당위의 이치입니다. 보통 사람도 이런 이치가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성즉리(性卽理)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만 보통 사람은 육체적 욕심에 가려져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욕심을 벗어났던 성인들만 알 수 있는 것이고 그 성인들이 알았던 것을 써 놓은 것이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논어 맹자 대학 증용 등( 참고로 격물치지 성의 정심은 논어가 아니라 대학에 나오는 것입니다.) 의 성현의 말씀을 기룩한 책을 읽는 것이 격믈치지의 실제내용의 대부분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살아 가야 할 길을 성현의 말씀에 의하여 찾아야 한다는 것이 격물치지가 되고 맙니다. 흄 등이 말하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네가 성인보다 똑똑해 ? 라고 반문 하면서 성인의 말씀을 절대화는 하여 성인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격물치지 실제 내용입니다.
[밴마철] [오전 11:15] 지난 번에도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왕양명은 바로 이러한 주자의 격물치지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 귀절에 왕양명의 논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千聖皆過影(천성개과영), 良知乃吾師(양지내오사)
“뭇 성인들이란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 양지가 곧 나의 스승이다.“ 이야기는 내가 갈 길은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내 안의 양지를 통하여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심즉리입니다, 왕양명은 책을 읽어서 성현의 말씀을 캐내어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내면 속에서 내 갈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해체주의자입니다,
[밴마철] [오전 11:25] 중국으로 온 천주교 선교사들은 격믈치지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철학philosophy 라고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 자연탐구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해석되는 것으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마치 주자가 격물치지를 성현의 말씀으로 한정시킨 것 처럼…여기에 둘이 동질감을 느낀 것입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간다는 것은 바로 자연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그것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해석하느냐? 의 문제입니다. 경험론자들이 말한는 실험과 관찰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염두하지 않고 바로 자연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밴마철] [오전 11:27] 예 흄은 불가지론자입니다. 회의주의자라는 절대적 진리를 의심한다는 뜻으로 그 자체 불가지론자입니다.
[밴마철] [오전 11:36] 왕양명을 격물치지에서 격을 바로 잡는다는 정(正)의 뜻으로 해삭하고 물을 사물과 나의 관계라뜻에서 사事라고 해석함니다. 나와 사물 혹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다고 해석해여 성현의 말씀이 끼어 들 틈을 없애 버립니다. 치지에서 지는 양지를 뜻하여 치지는 나의 양지를 완성해 나간다라는 것으로 해삭합니다. 종합해 말하면 나와 사물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내가 바로잡음으로 해서 나의 양지를 완성해 나간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11:40] 왕양명 복잡하면 모든 성인의 말씀은 지나가는 그림자이고 내 마음 속 양지만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는 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성인의 말씀은 지나가는 그림자” 라고 한 것이 바로 주자학의 격물치지를 단칼로 비판한 핵심입니다.
[Jack Shin] [오후 12:25] 격물을 성현의 말에서 나의 마음으로 이동했을 뿐, 여전히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리 있습니다.
어쩌면 주희보다 더 먼 거리를...
기존의 틀을 깨는 듯 했으나 다시 마음이라는 틀에 갖히는 한계..
재주술화의 재현일까요?
[kang] [오후 12:48] 그러나 그 시대에 성현의 말씀에서 탁 털고 일어나 우리의 발걸음을 줄여준거 아닐까합니다. 그가 그때 그 틀을 깨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음의 틀을 알아채고 깨기까지 닿기도 더 멀었지 않을까요. 주자보다 더 멀어진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일어서서 외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Jack Shin] [오후 12:53] 그럴수도 있겠네요. (thumbsup)
[kang] [오후 12:55] ㅎㅎ 신선생님 평소와 다르게 살살 다뤄주시네요~~^^
[Jack Shin] [오후 1:02] ㅎㅎㅎ
저는 안선생님의 도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저는 도의 시작이 싸가지 없고 무식한 질문에도 묵묵히 대답하고 갈길을 가는 거라고 보거든요... 모든 이들이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ㅎㅎ
[Jasmine] [오후 1:18] 공감합니다. 흄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던 중에 의견들이 올라와 저도 살짝 제 생각을 보태봅니다.^^ 흄이 귀납적 추론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 점, 과학적 명제도 필연성 아니고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한 점은 이후 증명되고 넓게 받아들여진 점이라고 정리합니다. 과학이닌 인식의 세계에서 필연성이란 틀에 갇혀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순환 논증오류 같은 데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큰 배움입니다. 매력적인 올리버 색스가 좋아할 만한 철학자 같습니다.^^
하지만 ,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지 않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럴 확률은 아주 희박하지요. 확률이 희박하다고 사실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고 보았을 때 우리는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현실이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단 건 관념 아닐까요? 양자물리학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세상을 사는 지금도 여전히 뉴튼물리학이 다 틀린 건 아니고, 여전히 많은 부분 우리를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않은가요?
경험론 또는 인과적
[Jasmine] [오후 1:19] 경험론 또는 인과적 필연성에 묶여서, 틀에 갇힌 구속을 거부하는 의미로서의 회의론을 높게 평가하지만,
사실 인류사를 통해 축적된 지혜와 성과들을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 누리며 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을 송두리째 부정 또는 회의하는 하는데 애너지를 쓰는 것보단 감사히 수용(사실 쉬운 게 아닌 근기가 저입니다^^)하면서 거기서 더 나아갈 길을 탐색하고 싶은 게 제가 철학 공부를 하는 방법입니다.^^
[Jasmine] [오후 1:29] 산선생님껜 싸가지 없고 무식해 보이지만 당사자에겐 절실한 물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규정짓고 단죄하는 듯한 어투에 걸려 말씀드립니다.
[Jack Shin] [오후 1:58] 저는 다른이의 질문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ㅠㅠ
저의 질문이 안선생님에 그럴거라는 말입니다.
[Jasmine] [오후 2:27] 어쿠, 제가 오해했네요.ㅠ
저는 수행이나 철학공부나 제가 갖고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같은 틀을 깨고 그로부터 자유로와지기를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수행이나 공부가 아상을 더 강화시키지는 않나 싶은 생각도 해서 다 소용없고 삶과 맞장뜨며 살자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 방에 똑똑한 철학자들은 어떻게 틀을 설명하나 구경하러 왔습니다.
칸트가 설명한 틀,
소쉬르의 틀
푸코의 틀 라캉의 틀
니체의 틀 데리다의 틀.....
그로부터 제가 갇혀있는 틀(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올 때 말씀드렸듯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한다는 저와의 규칙을 지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