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오전 5:06] 저는 우리 공부방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전에 푸코의 예술적 삶에 대해 하다가 좀 중단 한 일이 있습니다. 푸코는 예술적 삶을 자기만의 성적 쾌락, 요가 명상같은 걱 포람해서 자기 몸에 맞는 운동개발, 자기 입맛과 몸에 맞는 음식개발과 재배노력, 자기만의 솔직한 글쓰기와 그것의 소그룹과 공유(파레시아). 이런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술적 삶이며 그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틀에서 벗어나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푸코는 파레시아가 일종의 도 닦는 수행이 된다고 합니다, 자기 내면을 맑게 하는 운동 같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두번째는 어제 말한 올리버 삭스입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사회를 구경하는 통찰력을 더 높인다는 것입니다. 생존욕구와 가족부양의 의무가 적어짐으로 가지게 되는 자유를 여전히 사회적 욕망 타자의 욕망에 써 버리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자의 욕망에 껄덕거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는 방식에 푸코의 파레시아 삭스의 통찰력 높이기 보다 좋은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부방이 파레시아 사회구경의 통찰력 같은 목표도 있지만 아주 현실적으로 치매예방의 뇌운동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무료해 있으면서 치매방지를 위해,화투패 컴퓨터 게임 이런 것에 빠지는 것보다 같이 이런 저런 세상 이야기하는 것이 치매방지운동에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보통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정신적으로 위축되며 치매 걱정을 하는데 더 활발한 뇌운동을 한 올리버 삭스가 부럽습니다, 가만히 보면 여러분들이 올리는 댓글에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관점이 매우 신선하고 예리함에 놀랍니다, 저는 여러 분들이 철학사를 많이 읽어 보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철학사의 흘러 온 방향을 꿰뜷고 있는 것에 놀라기도 합니다, 파레시아의 장을 충분히 만들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틀을 깨는 솔직한 댓글이 공부방 유지에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블러그 좀 해 보니 보러 오는 사람들은 있지만 현장성이 떨어져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부방이 잘 그리고 오래 굴러가려면 솔직한 자기견해의 표현과 더불어 상대방의 솔직한 표현도 인정하고 그 표현함에 위축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저는 늙어서 아침 잠이 좀 적어졌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풀어내면 명상한 것 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방이 오래 잘 굴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밴마철] [오전 5:20] 신 선생님 예리하십니다. 양명학의 풍조가 휩쓸던 명나라는 망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책을 다 팽개치고 자유로운 감정의 발산에 주력한 양명좌파들의 득세에 있었다고 황종희는 말합니다, 황종희는 전덕홍 계열에 수증파에 있던 사람입니다. 수증파라는 것은 왕용계 계통에서 공부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 공부는 여전히 필요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왕용계의 돈오돈수적인 것을 비판하고 돈오점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황종희 스승 중의 한명인었던 고염무라는 사람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자학의 틀을 깨면서도 어떤 실증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불행이도 이것이 자연의 탐구로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주자학적 경전의 해석의 틀을 깨는 것에 집중한 것입니다. 이것을 청나라 때 일어난 고증학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주자학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구조를 꿈꾸었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자연과학기술로 무장한 서양에 침탈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추사 김정희도 바로 이런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며 실사구시를 외쳤지만 그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분석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제레미 다이먼드는 마르크스 이론을 이어 받아 봉건제도의 부재론을 말합니다, 사실 일본은 봉건제도가 있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은 없습니다, 나증에 봉건제도 부재론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좀 간단하 이야기 하면 지방이 여러개로 쩌개져 죽기아니면 살기로 싸우게 되면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온갇 꾀를 다 발휘하게 됩니다, 여기서 과학기술이 나오고 옹호된다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5:27] 강 선생님 말씀에 동감하면서 좀 보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서양중세신학과 동양의 주자학의 틀이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중세 신학을 핵심은 “ 하느님은 내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의 하느님을 아는 것은 반드시 성경과 그것을 해석한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내 속의 하느님을 알고 내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의 해석자들의 말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해석권은 교황청이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맘속에 하느님을 내 맘대로 해석하여 내 맘대로 갈 길을 마련한다면 그것은 이단이고 마녀입니다. 중세의 틀을 깨고 르네쌍스로 넘어가는 과정에 이 마녀 훅은 미치광이 광인 떠돌이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기 위에서 보았던 시너드 오코노는 중세의 기준으로 마녀입니다, 여자들에개 억압이 더 강하게 작동하였고 또 여자들이 더 민감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종교개혁이 일어나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의 하느님을 자기식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지만 곧이어 그 해석권은 개신교 교회 목사에게로 넘어 가버린 것이지요. 주자학도 이런 중세신학과 비슷합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본성의 이치를 부여한 것은 확실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태어나면서 부터 다 알았던 성인이 그것을 말씀으로 전해 준 경전을 통해 그 본성의 이치를 알고 가야랄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격물치지입니다, 서양중세에는 그 격물치지 같은 것을 지성intellect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그 경전의 해석권자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학의 예의범절은 그 해석으로 부터 나온 것이고 그 해석이 일반 사람을 어떤 틀로 구겨 넣는 것입니다, 그 틀은 여자에게 더 가혹했지요. 그래서 좀 생각이 깨인 사람들은 주자학의 예의범절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무기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에 의해 죽어간 사람은 여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양명학은 내 마음 속의 본성적 이치를 내 맘대로 해석하여 내 갈 길은 내가 만든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루터의 만인사제설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중세신학이나 주자학에서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쨍쨍 비치는 태양 아래 교장선생님 훈화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거부가 안되고 온 몸으로 거부되는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밴마철] [오전 5:45] 배 선생님의 말씅에도 동조하면서 제 의견 조금만 드려 보겠습니다, 당시 역사의 흐름으로 본다면 과학까지도 못믿겠다고 한 흄보다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 칸트가 더 옹호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 주술를 벗어나 탈주술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과학을 못 믿게겠다는 것은 역사흐름의 발목을 잡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과학지상주의가 모순을 잉테하다가 다시 재주슬화 하면서 억압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는 과학도 뭇믿겠다는 흄이 옹호되는 측면이 있는 걱 같슺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틀이라는 것이 모순을 잉태하면서 변증법적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틀과 그것의 변증법적 운동.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칸트가 끝나고 헤겔을 좀 할 생각입니다. 칸트와 헤겔이 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이것이 끝나면 나머지는 비교적 쉽게 이해 될 것이라고 생각핮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진도를 나아가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칸트 헤겔은,약간 수학 공식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가 어렵지만 알고 나면 다른 문제들이 쉽게 풀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면 항상 빙빙돌면서 알듯 모를 듯 하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밴마철] [오전 5:51] 변증법을 좀 알아야 요즘 인문학에서 말하는 진화론도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변증법이나 진화론 모두 모든 것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인데 변증법은 궁극적인 한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고 진화론은 수 많은 점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변증법이 아니라 진화론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07] 저기 위에 강은희 선생님에게 답변들인 것에 보충 하나 하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의 지성은 유한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 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고 하였습니다,
[밴마철] [오전 6:10] 주자가 대학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蓋自天降生民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 然 其氣質之稟 或不能齊
개자천강생민 즉기막불여지이인의예지지성의 연 기기질지품 혹불능제
하늘이 生民(백성)을 내림으로부터 이미 그들에게 인, 의, 예, 지(仁, 義, 禮, 智)의 본성(本性)을 부여(賦與) 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건 만은 그러나 그 기질(氣質)을 받은 것이 간혹 똑같지 않기 때문에,
是以 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
시이 불능개유이지기성지소유이전지야.
이로 인해 모두가 그 본성(本性)의 소유(所有) 함을 알고서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一有聰明叡智能盡其性者 出於其間則
일유총명예지능진기성자 출어기간즉
한 사람이라도 총명(聰明) 하고 예지(叡智:지혜가 매우 뛰어난 사람) 하여 능히 그 본성(本性)을 다한 자가 그 사이(인간 사이)에 나오면
天必命之 以爲億兆之君師 使之治而敎之 以復其性
천필명지 이위억조지군사 사지치이교지 이복기성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수많은 백성의 군주와 스승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그 백성의 본성(本性)을 회복하게 하니,
[밴마철] [오전 6:18] 주자의 글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 “본성을 소유함을 알지만 그것을 온전히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은 위에서 인용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인 스승같은 해석권자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본성의 소유함을 알고 그 본성을 온전히 할 수 있다고 하면 양명학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도 스승도 필요없는…조그만 차이가 틀을 만들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밴마철] [오전 6:46]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 와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가 잘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자학의 성즉리는 본성이 내 마음 속에 갖추어쟈 있지만 기질에 막혀 그 본성을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성즉리(性卽理)·심즉기(心卽氣)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음므로 성인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격물치지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왕양명의 심즉리는 그 안에 성즉리도 포함된 것으로 내 안에 본성이 갖추어져 있고 내가 또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와 성인 간의 근본적인 차이도 없게 되어 주자학적 격물치지도 필요없고 스승 성인도 필요없게 됩니다. 주자와 양명의 차이는 “본성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과 “ 본성이 갖추어진 것을 내가 알 있다” 라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왕양명이 깨달았다는 용장오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50] 저기 위에 큰 실수하였네요. 주자의 글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본성의 소유함을 알지만 그것을 온전히 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온전히 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밴마철] [오전 6:53] 진도를 나아가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틀의 전체문제와 칸트의 특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주자학과 양명학 헤갈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밴마철] [오전 7:18] 지금까지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안다 배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두 측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로 앎을 확장해 가는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 틀에 갇히도록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된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판적 사고 비판적 책 읽기가 증요한 것입니다. 인문학의 큰 목적 중의 하나가 비판적 사고 비판적 책 읽기입니다,
[Jack Shin] [오전 9:27] 우문현답이라는 말을 절감할 정도로 상세한 맞춤형 답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