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개념적 이해입니다. 이 개념적 이해를 intellect(지성 오성)이라는 하는 것입니다. 잘 따져 보면 성리학의 격물치지도 일종의 intellect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격물치지를 일종의 intellect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적영지는 격물치지에 선행하였던 앎에 대한 문제였고 이것 역시 intellect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떤 노르스름한 덩어리가 우리 머리 속에 이미지의 상으로 만들어 졌을 때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판단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판단의 기준이 그 노르스름한 상에 적용되어야지 혹은 개념이 그 상에 빛을 비추어 주어야 비로소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을 통하여 들어온 상( 감각 재료: 감성)과 개념의 빛( intellect 오성 지성)이 만나 어떤 판단이 있어야 안다는 것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그런 개념의 빛은 어디서 오는가? 첫번째로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결부된 중세신학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이용해 신학적 진리가 100%이라고 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것이 인간 자체에 내재된 초월적 구조이다는 것이 칸트입니다. 그 틀의 특징은 수학과 과학을 할 수 있는 틀로 수학과 과학은 100%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번째로 그틀은 언어구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하지 않았지만 한번 미리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언어를 통해 습득되는 사회문화의 체계에서 그 개념의 틀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가면 100%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첫번째 두번째가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고도 생각할 여지를 가지게 합니다.
칸트철학을 형식주의라고도 합니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같은 물이지만 그것이 화장실에 변기 속에 있을 때와 식탁 위에 있을 때 또는 성당의 정화수로 쓰일 때 각각 다릅니다, 물이라는 내용은 같지만 그 형식의 틀에 의하여 그 물의 내용도 다르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야가 했지만 밀가루 반죽이 있다면 그 틀이 븡어 형태로 되어 있으면 붕어빵이고 국화형태로 되어 있으면 국화빵입니다, 내용을 결정하는 그 틀을 초월적 구조라고 하고 거기에 대한 용어는 여러가지로 많습니다, 개념형식 오성형식 지성형식 도식 …그런 것을 대충 다 초월적 구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희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여기서 용어 하나만 더 공부하고 가겠습니다, category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범주라고 번역합니다. 개념의 틀을 분석해 보면 그 판단을 내리는 기준 틀이 12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안에 인과관계를 100%로 만들어 주는 것도 있습니다, 12개 범주로 들어가면 복잡하기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기서 멈추고 카테고리라는 것도 일종의 초월적 구조이다. 초월적 구조를 분석했을 때 12 개로 분류된다는 정도로 알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칸트의 의도는 앎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그 앎이 어떻게 100%가 되는지에 대한 논의입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에 의하여 우리는 100%의 확실한 앎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초월적 구조로 인식의 틀에는 원인과 결과를 100%로 만들어 주는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의 문제를 꺼내 새로운 반전을 만듭니다. 인과관계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면 죽는다. 즉 영양 공급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 영양공급을 원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념을 위하여 단식을 한다고 하면 그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인과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있지만 그 인과관계를 무시할 수 있는 자유의 의식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아주 복잡해 집니다. 사실 인과관계와 자유는 정 반대되는 이율배반antinomy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이율배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앎을 명확히 하는 것은 인과관계 100%에 의존하는 것이 있고 그 100%의 인과관계를 뛰어 넘으려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이성은 주로 100%의 앎의 세계에 대해 말하구 실천이성은 주로 자유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순수이성 마지막 부분에서 실천이성으로 넘어가기 위한 장치를 오성intellect와 다른 이성reason이라는 것을 꺼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좀 복잡하니 이 문제는 내일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100%의 인과관계에 의한 과학의 세계에 살면서도 다른 한편 그 인과관계를 무시할 수 있는 자유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 칸트의 커다란 의도입니다,
블교에 12연기있습니다, 무명은 행을 있게 하고 행은 식을 있게 하고 …..12가지로 나갑니다, 이런 것을 유전연기라고 합니다, 무영에서 생노병사까지를 일종의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행을 통해서 이런 인과관계를 끊어가는 것을 환멸연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소승블교에서는 이런 인과관계를 끊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며 그 인과관계의 법칙을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나름의 과학적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블교는 그 초점을 환멸연기에 두고 있습니다. 자유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분별상을 명확히 하는 것은 과학적인 앎이지요. 그 분별상이 인간을 구속한다고 보고 그 분별상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은 자유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앎이라는 것이 세계의 인식을 명확히 해주지만 다른 한편 그 앎이 구속이 되어 자유를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율배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1848
강혜근의 고사성어 다시읽기 - 사생취의(捨生取義) - 대전일보
'목숨을 버리고 정의를 택하다'라는 뜻으로 '옳은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것'을 비유한다. '맹자(孟子)'의 '고자(告子)'상편에서 유래했다.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www.daejonilbo.com
자연의 법칙과 양심의 법칙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맹자의 위의 논의가 잘 보여 줍니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안다는 것과 선하게 산다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함축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이론적 교종과 실천적 선종의 대립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립에도 이런 문제가 개입된 것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J8XHBQ3CpPA&si=iBfsiqhEvHZswWZp
인과관계를 거꾸로 거슬러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는 노랫말에 나오듯이 보이지도 않는 끝입니다. 인간은 앎을 명확히 하게 하는 지성intellect도 있지만 그것을 거꾸로 거슬리는 보이지도 않는 끝을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칸트는 intellect와 구분해서 reason 이성 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도출과정은 좀 복잡하겠지요. 내일은 이것을 좀 해 보려고 합니다. Intellect 오성과 reason 이성은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보면 뻔히 손해 날 것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과학적 인과적으로 따져보면 손해나기 때문에 안해야 하는데 양심 같은 것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가 자기가 죽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할지 말지 망설이겠지요, 과학적 인과관계 따지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과관계를 거꾸로 거슬러 그런 것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할지 말지를 망설이다 결정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자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인관관계가 지배하는 과학의 세계도 있지만 인과관계를 거스리며 거역하는 자유의 왕국도 있다는 것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_PH3L06INwI&si=7QDe27tj8RYLSwZL
이런 감정에 휩싸인 노래 칸트는 좋아하지 않고 흄은 좋아할 것 같습니다.
[Jack Shin] 알파고를 시작으로 인공지능의 발전을 보면 위의 3가지 경우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겁니다.
알파고 전에는 칸트의 이론을 받아 컴퓨터에게 개념을 주고 사물을 구분시켰는데, 개와 고양이 구분을 못해냈죠.
무수히 많은 개의 사진을 보여주고 학습시키고 인간의 뇌를 모방해서 추상화를 시킨 결과 성공했죠.
초월적 구조, 자연의빛, 언어구조 등이 없어도 가능한 디지털 세계...
인간세계와 다를까요?
https://youtube.com/watch?v=k-Wu6pQFMYE&si=i2NQACGHfd3QWpLk
[밴마철]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원래 AI는 마빈 민스키가 데까르트철학에 기반해 그 이론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했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졌듯이 인공지능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소프트웨어 어떤 부분을 하드웨어 어떤 부분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런한 정신을 실체라고 합니다. 칸트에게도 intellect를 설명하는 부분은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의 초월적 구조를 컴퓨터 window 프로그램에 비유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춈스키의 언어학이론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춈스키는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어찌 되었든 초월적 구조로 나라는 주체를 내세운 것은 데까르트의 실체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이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은 흄입니다. 그는 실체와 같은 인간주체를 배격합니다. 즉 블교와 비슷하게 ego는 없다고 합니다. 데까르트의 실체 칸트의 초월적 구조는 없다고 합니다. 단지 관념의 상호 연결들만 있고 이것들이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뇌과학자가 뇌를 열어 보았을 때 자아나 정신적 실체 초월적 구조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뇌 신경망만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맺음만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흄이 자아는 없고 관념들의 관계들만 있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딥 러닝도 이것과 관련있다고 들었는데…확신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칸트 끝나고 흄 칸트 불교 비교하면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는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종교와 다릅니다. 종교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지만 철학은 비판을 허용합니다. 100%의 철학은 없는 것이고 비판받으면서 계속 수정되는 것만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 칸트의 초월적 구조와 데까르트 정신적 실체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실체 초월적 구조 이런 것은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거의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요즘은 뇌 안에 신경들이 연결되는 것에는 프랙탈 구조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칸트적인 뇌과학…이런 걸 자세히는 모릅니다.
사실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주고 받는 신호도 일종의 언어입니다. 수학을 가미한 인공언어입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언어와는 다르지만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언어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칸트의 초월적 구조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스티븐 핑거 동영상 하나 올립니다. 이 분이 하는 이야기가 거의 춈스키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춈스키 스티븐 핑거 가장 강력한 칸트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다양한 말을 하지만 그런 것은 근본구조가 있어서 그것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칸트의 초월적 구조의 틀frame 을 상장하지 않고서는 블가능하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소쉬르의 전통을 계승한 프랑스 언어구조론자들의 생각하는 좀 다른 것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H8LWsMbn8xQ&si=NXlEqIgyeI5Rq4Mx
언어는 창문window이다고 하는 것은 칸트가 말한 틀을 안경으로 비유한 것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핑거는 춈스키 이론을 대중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