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오늘 또하나 중요한 개념을 공부합니다. 통각apperception이라는 것입니다. 통각은 노르스름한 상이 머리 속에 생겨났을 때 그것을 똥이다고 판단해 주는 개념이 있어야 앎이 성립한다고 하였습니다. 칸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것은 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덪븥어져야 앎이 자기에게 확증된다고 합니다. 감성과 오성의 결합으로 생겨난 앎에 자기가 의식하여 확증하는 자기 의식(self consciousness)이 개입되어야 비로소 앎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통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데까르트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까르트는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고정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고정적 실체라는 말이 어렵지요. 그 뜻은 자기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프트웨어로 컴퓨터 프로그램은 자기에게 주어진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기 완결적 적인 것으로 그것의 각각의 요소가 하드웨어에 대응하면서 전달되는 형태입니다, 이때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정신에 해당하는 것이고 하드웨어의 작동이 인간의 몸이면서 또 물질에 비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적 운동은 이미 완결된 형태로 완성된 프로그램화된 정신의 활동과 대응하여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이것은 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도 데까르트와 같이 어떤 고정블변의 자아 실체 같은 것을 염두한 것입니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 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 ‘이것은 똥이다’ 라고 생각하개 해 준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경험적 통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큰 반전을 만듭니다. ‘이것은 똥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에서 말하는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다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되겠지요. 이것을 다시 또 생각하면 거기에 또 다시 나를 생각한다는 것이 덪븥여져 무한히 가는 연속이 되겠지요. 나라는 것은 감성과 오성에서 결합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감성과 오성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나의 의식의 활동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칸트는 경험적 통각과 대비시켜 순수통각 혹은 초월적 통각이라고 합니다, 이 초월적 통각을 추론하며 사유하는 것을 이성reason이라고 합니다. 이 초월적 통각에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적 통각은 자기 완결적 동일성이라면 이 초월적 통각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으로 자기 완결적인 것이 아닙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곳 자유를 향해 운동하는 활동성 자체입니다. 이것은 실체가 아니고 실체처럼 있는 경험적 통각의 틀을 깨는 무한한 자유의 운동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제 인과 관계100%의 세계와 그 인과관계를 거스리며 깨는 자유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간 좀 어렵지요. 과학과 자유 이 두개의 축이 근대 문명을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칸트가 의도하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어제 말한 가장 강력한 칸트주의자 스티븐 핑거의 이야기를 좀 들어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166pnXA0-HA&si=fAEBZvoth4Kxs6yM
위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네요. 순수통각 초월적 통각으로 실체없이 활동하는 나를 사유라고 추론하는 것을 칸트는 이성reason이라고 합니다.
위의 동영상을 보면 과학(순수이성)과 자유(실천이성)으로 무장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장미빛 낙관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주의 칸트의 이론은 지금도 유효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인간중심주의 근대적 낙관론이라고 합니다. 이런 핑거의 논리대로면 전쟁이나 환경파괴 인간소외등도 큰 장애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능력으로 충분히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인지 의문이 좀 듭니다.
예전에 우리가 춈스키와 푸코의 논쟁을 보았습니다, 그 주제도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춈스키는 여전히 칸트가 옳고 그 칸트의 정신을 더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푸코는 칸트는 니이체의 방법으로 해체되어야 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 가야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니즘입니다. 춈스키 핑거는 그런 포스트모던의 주장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뜻입니다. 과학과 자유의 이념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전히 근대인가? 아니면 포스트모던인가? 그런 물음이 담긴 토론이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칸 뷰티라는 영화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깔끔한 미국의 중산층의 내면에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 불안 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 철학은 겉으로 깔끔하고 화려 합니다, 나중에 좀 하겠지만 인간이 입장바꿔 생각하기로 거짓말을 죽어도 하지 않는다면 모든 분쟁은 종식되고 영구평화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한 깔끔 화려함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통제불가능한 욕망을 이야기 하면서 칸트를 비판하기 시작한 사람이 쇼펜하우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님증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아메리칸 뷰티는 바로 칸트의 세계관과 쇼팬하우어의 세계관의 대립을 그린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wKaPlK7Iozg&si=lRHP95ASjbhsI3iV
앞으로 논의하는데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은 실체가 있는 나는 과학을 100%로 만들어 주는 것이고 실체가 없는 나는 자유를 향햐 열려있다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이렇게 모순된 이율배반의 세계에 살고 있는가? 에 강한 의문을 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헤겔입니다, 또 칸트를 통하여 불교의 무아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말하게 되면 실체없는 나로써 무아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점도 알아두시면 앞으로 논의에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Jack Shin]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된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고 해야 앎이 완성되고,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의식이고 이 의식이 개입하는 것이 통석이다...
뭐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만, 데가르트가 정신을 고정적 실체라고 한다면, 사실 실체라는 것이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인데, 변동적 실체도 있다는 것인가요?
[밴마철] 실체라는 것은 완결된 자기 동일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해 버렸다면 이미 실체가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칸트에게는 통각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경험적 통각과 초월적 통각 경험적 통각은 데까르트와 비슷한 것이지만 초월적 통각은 그 끊임없는 활동으로 인하여 자유에 있게 됩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불교의 무아와 비슷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푸코의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쟈스민] 칸트는 정말 어려운 말을 좋아하나 봅니다.^^
통각, 특히 초월적 통각이 회광반조 같은 것일까 싶네요.
[밴마철] 예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외부로 달아나는 빛을 거두어 들여 자기자신을 되돌아 본다는 것인데 초월적 통각에 적합한 표현인 것같습니다. “’ 이것이 된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고 했을 때 그 나는 생각한다고 하는 나를 다시 한번 반추하며 되돌아 보면 그 것은 무규정적이라는 것이라는 지요. 그것이 규정이라고 하면 다시 그 규정하는 나를 되돌아 보게 되니까요. —-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에서 그 나를 외부와 관계를 버리고 자기자신를 되돌아 보면 그런 나는 무규정으로 자유속에 있게 둰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근거가 무이기 때문에 자유이다는 것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무 훅은 공이 왜 자유의 근거인가? 이런 것에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동영상 하나 올려 봅니다.
https://youtube.com/watch?v=17jFZAw8l4E&si=NEqS36fGFStMku3A
사막은 어떤 방향성도 없기 때문에 모든 방향성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에크하르트도 신을 사막으로 비유하며 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무나 공은 제약이 없이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자유의 근거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Jack Shin] 불교 방송을 듣다보면, 우문우답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초점이 맞는지...안맞는지... 공과 색의 중간 연결점을 어떻게... 생각 이전을...어떻게...사막과 나의 자유로움의 인과관계 등등이 다 단절되어 들립니다. ㅠㅠ
누가 해석 좀 해주세요
[밴마철] 저는 이 스님이 철학과를 다녔다고 하는데 나름대로 하이데거 이런 책을 좀 읽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색과 공의 연결을 하이데거 말한 존재자의 근거는 존재, 존재의 근거는 자유, 자유의 근거는 무 이런 것을 염두한 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을 가집니다. 존재자로서 내가 가장 나다움 내가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낄 때는 아무 것에도 나를 간섭당하거나 방해당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존재라면 그 존재는 간섭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자유 속에서 내가 가장 나를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는 것이라거 생각합니다.그렇다면 그 자유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공이 무라면 색은 존재자이고 그 사이에 이런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쟈스민] 문을 열고 나가면 길이 있어요. 보행이든 운전이든 길따라 걷게 되어있고 어떤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규칙을 무시하면 사고로 이어지므로 몸에 밴 많은 규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안전 규칙에 갇혀 길을 가게 되죠. 사막엔 아무 것도 없죠. 길도 신호등도 운전규칙도... 모든 게 열려있는 거죠. 발을 내딛는 순간 순간이 나의 결정을 필요로 하죠
언제부턴가 저는 무나 공이 열려있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너무 단순하고 뻔한 답을 드려 죄송~~
[ OKGUEM LEE]
단순하고 뻔한 답....좋아요!!
[밴마철] 예,맞습니다. 열려있음은 닫혀있음의 반대인데 닫혀있음 그자체로 독립해 있다는 실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공은 무자성 즉 실체가 없음이지요.
[Jack Shin] 스티븐 핑커와 같이 발언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미래를 불안하게 예측해야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 ㅋㅋㅋ
저는 핑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온갖 부정적인 뉴스 속에서도, 절대적인 빈곤, 성평등, 인권,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전지구적으로 발전해 왔거든요.
다만 인류가 계속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만 저와 다릅니다.
[Jack Shin] 역시 도력에 차이가 많습니다.
그 중이 한 말 속에서 이리도 깊은 뜻을 읽어내시다니, 부럽습니다.
[밴마철] 우리가 앞에서 칸트의 초월적 통각을 대충 살펴보았는데, 그 비슷한 논의가 불교 유식론에도 있습니다, 견분 상분 자증분 증자증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견분은 본다는 것입니다, 상분은 봄으로 인하여 마음 속에 이미지 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증분은 칸트의 경험적 통각 비슷하게 상분에 대하여 스스로 의식으로 확신하며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증자증분은 초월적 통각비슷합니다. 자증분을 있게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성으로 가면서 공으로 귀결되는 점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염두하면서 생각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유럽과 미국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큰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았슴니다. 2차 대전을 참전했지만 전쟁터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2차 대전을 통하여 슈퍼파워가 된 점이 있습니다, 유럽은 참혹했고 패권도 미국에 넘겨줘야 했으니 …위기의식이 컸던 것 같습니다. 미국보다 먼저 근대 산업을 건설하면서 공해나 자연파괴에 대한 의식 없이 무작장 하다 보니 그 또한 위기의식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사람들 칸트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존 롤스는 칸트철학에 기반해 정의론을 쓰고 그것이 민주당의 중요한 강령의 이론적 뒤받침이 되는 것을 보면….
[쟈스민] 역시 유식론은 용어부터 어렵네요. 마치 칸트처럼...^^
육근 육식 육경 18계는 좀 알아듣겠는데 유식론의 4분은 용어부터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
https://youtube.com/watch?v=fBHaCq2BoPg&si=0WyKhfGSN194fSG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