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칸트가 말한 자유는 공공적 사용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어려운데 쉽게 이해하기 위해 존 롤스의 정의론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존 롤스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샌들은 스승 존 롤스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 정의는 무엇인가? 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존 롤스의 정의론은 미국 민주당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그 전에 미국 대통령 후보 버니 샌더스는 더욱 강경하게 존 롤스의 이론을 관철시키려고 하면서 민주당과 마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칸트이론이 지금도 유효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 본 것입니다.
존 롤스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는 여러가지 경제적 이익과 관련되어 생각을 하지만 이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모른다는 상태를 가정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나는 부유한 사람 금수저의 아들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흙수저의 아들로 태어 날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채 흙수저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열어 둔 채로 회의를 한다면 금수저에게는 혜택을 덜 가게 하고 흙수저에게 더 많은 혜택을 가게 하는 것에 동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금수저에게는 세금을 통해서 좀 빼앗고 흙수저에게는 그 세금으로 보충해 주는 것에 합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금수저로 태어날지 흙수저 태어날 지 모른다는 가정 즉 무지의 베일 속에서 어떤 원칙에 합의한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원칙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보편타당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그런 도덕적 원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런 원칙이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회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초월적 혹은 선험적 형식으로 주어진다고 한 것입니다. 이점에서 칸트와 존 롤스는 다르지만 존 롤스는 칸트의 초월적 도덕 형식이 무지의 베일에서 원칙의 합의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어렵지만 저희 같은 아마추어에게 있어서 칸트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롤스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에게 제일 도덕의 원칙은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도록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바로 이 원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공적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본 스티븐 핑가가 왜 칸트주의자인가? 그런 점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토지 공개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토지에서 얻는 불로소득은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로 얻는 소득입니다. 그럼으로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두 세금으로 환수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토지는 단지 명의만 개인으로 있게 하고 그 불로소득이 부분은 국가가 환수하여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니 샌더스는 이것을 강하게 밀어 부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버니 샌더스가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그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어째든 미국식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칸트 이론이 공산주의와 얼마나 가까운 것이냐? 그런 논의도 있습니다. 사실 집 한 채만 가진 사람은 토지 공개념이 그렇게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선동하면서 공포를 부추기는 세력도 있습니다. 집 한채만 가진 사람도 그 공포에 휩싸여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무지의 베일속에서 원초적 원칙에 합의” 라는 것이 존 롤스가 주장한 것인데 이것은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입장 바꿔 생각하기” 이라는 것입니다.이런한 것이 감정에 기반한 것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원칙에 기반한 것이 되어야 하느냐? 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게 됩니다.
https://youtube.com/watch?v=NSNpnv2EI8I&si=48b7-Qln-4tHqky_
캐나다에서도 이 존 롤스의 property owning democracy 를 강력히 밀어 붙이자는 주장도 있네요. Property owning democracy는 토지를 개인이 소유를 하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국가가 환수하여 재 분배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개인은 명목상 등기만 가지는 셈이 되고 그 실질은 국가에 속하게 됩니다.
https://youtube.com/watch?v=7hn2b5-50go&si=PcfvRrzNWf14wAkb
[쟈스민] 저는 맹자의 심물망 물조장 하시면서 지나친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닌 중도의 길을 말씀하실 때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우리는 매일 모두가 가는 길, 길 있는 길 위에서 공공의 질서를 염두에 두면서 살고 있지만, 한번씩 길 없는 길을 꿈꾸며 나만의 길을 만들고 찾으려는 그런 것마져 없다면 인생이 참 딱딱하고 황량하고 재미없을 거 같습니다. 울 공부방의 어느 분처럼(제가 누구라 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실 ㅎㅎㅎ) 사막이든 오지든 가리지 않고 훌쩍 길없는 길을 찾아 떠나는 그런 자유가 목마르게 그리워질 때가 있는 거죠.
[밴마철] 예 저도 그렇습니다. 칸트의 약점도 많지요. 푸코가 강하게 제기하는 칸트 반론을 보면 중도라는 의미도 좀 깊게 새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좀 하려고 합니다.
[쟈스민] 오늘도 공공의 질서를 염두에 두면서 긴장하면서 애끓이면서 살아야 하지만 내일은 훌쩍 떠날 수 있음에 설레입니다. 완전 나만의 자유는 사실, 어디를 떠나는 것보단 남의 눈치 안 보는 나만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밴마철] 바로 말씀하시는 부분이 푸코가 칸트를 비판하는 지점입니다.
공공의 질서가 강박적으로 작동하면 그것이 삶의 짐이 되어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인류공영의 이바지 이런 허울이 삶을 무겁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쟈스민] 오늘 아침에, 제가 일상에서 겪어내야만 하는 스트레스를 대처하는데 이 공부가 작은 틈을 마련해 준단 걸 알았습니다. 이 틈이 커지면서 공공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 사이를 춤추듯 가볍게 조율하며 살게 되는 꿈을 꿉니다. 문득 새삼스럼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