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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화.칸트.물자체.계몽.하이데거.푸코.춈스키

by 마철방 2023. 12. 28.

[밴마철]  자연 그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촉발시킨다는 것에서 칸트와 하이데거의 입장은 같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의 색즉시공도 크게보면 이런 뜻이고 앞에서 했지만 유식무경도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와 현상이라는 말로 써서 설명한 것입니다.,그리하여 물자체에 의해 촉발된 현상이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통일되어 모든 사람이 100%을 인정할 과학의 세계가 열린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단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하나이고 진리도 하나이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진리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입니다.,다양성은 인장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회화 교육 이런 것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고 이것이 계몽의 기획입니다. 결국 이것은 과학과 민주라는 근대를 먼저 창안한 서구의 백인남성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뜻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무언가를 촉발 시키는 것과 그 촉발되는 것을 수용한 것을 존재와 존재자로 구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열리는 관계를 의미의 세계라고 한 것이고 그것을 시를 통해 설명하니 당연히 그 의미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수 많은 것이 된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근대부터 있어 온 하나의 세계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누군가를 지도하여 이끌고 간다는 계몽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것으로 이차대전이후 그는 미군에게 감금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치와 싸웠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시한 다양한 의미의 세계가 결국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막아낼 수 있는 보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가장 강력한 계몽의 기획입니다. “필요한 만큼 쓰고 하고 싶은 만큼 일을 하자” 라는 이념을 가진 것으로 인류는 모두 이쪽으로 가게되어 있는 역사적 필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야 할 단 한가지 길을 제시하고 그쪽으로 가도록 계몽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이 보다 탁월한 계몽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항 할 수 있는 무기는 하이데거가 말한 다양한 의미의 세계이고 계몽에 대한 비판적 사고라고 생각했기에 그를 옹호한 것입니다. 

 

푸코와 춈스키의 대결도 결국은 계몽이 아직도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계몽의 유효기간은 끝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가 1971년으로 50년 넘는 일입니다. 논쟁이 끝난 후 푸코는 자신이 춈스키에 약간 밀렸다고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는 근대적 계몽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되돌아 보면 국민교육헌장 새마을 운동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마르크스의 종파주의의 일환으로 푸코가 우리나라에 알려졌고 푸코는 쓰레기 취급받았습니다. 역사의 진보는 없고 성적 자유( 게이 레즈비언 인정)만 이야기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매우 다릅니다. 갑질( 미시권력) 꼰대(계몽) 이런 것으로 우리사회를 바라 보는 강력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 만약에 푸코와 춈스키가 다시 논쟁을 한다면 그 추가 약간 푸코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개인적으로 해 봅니다.

 

이런 뜻에서 철학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의 세계는 결국은 다원주의로 연결되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는 부정되고 상대적 진리만 인정하게 됩니다. 차별은 없고 차이만 있는 세상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내세워 우리 모두 그쪽으로 가자고 하는 계몽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세상입니다. 때문은 철학도 모두 함께 가야 할 어떤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 어떤 길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만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파생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나아가야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나아가야 길은 모릅니다. 어디로 가게 될지 그러니 진보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다만 다양한 세계로 각자의 우산을 쓰고 함께 가는데 잘못되어 삐져 나오는 것에 대한 비판만 있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하여간 왕양명이 말한 “모든 성인의 말씀은 스쳐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나를 이끌 진정한 스승은 내 마음 속의 양지이다.“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납니다.

 

계몽에 의한 진보는 어떻게 하든 나아가야 길을 예측가능predictable 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계몽의 비판에서 오는 진보에 대한 회의는 예측블가능성unpredictable 한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보에 대한 회의가 반드시 자포자기하는 허무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에 했던 카너만의 행복론처럼 진보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허무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너만은 추운 오하이오 사람이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되면 더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이사를 가게 되면 거기에도 다 문제점이 있어 실망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지금 여기에서 해결하도록 해야지 희망고문을 하면 더 불행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 재미있게 본 동영상 하나 공유하겠습니다.봉쇄수도원에 들어가서 수행을 하면 모든 인간적 번뇌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번뇌가 있고 그것이 더 지독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동영상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Yud1bAMWLL8&si=ogJe_Z_z_AItleWh

 

https://youtube.com/watch?v=bAVnG22NBiM&si=nbejtyQYFf3rL8jj

 

니이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좀 어려운 것인데 쉽게 생각하면 어디를 가든지 그 만큼의 고통이 있고 그만큼의 고통을 이겨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더 나은 세계로 진보 같은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같다고 해도 여전히 똑 같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