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 Shin]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나는 여기 있다 에서 있다가 존재인데, 이 있다가 있게 하는 힘으로 승격되고,, 이 있다가 나를 있게 하고..
이 있다가 평소에는 은폐...즉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나면, 탈은폐가 되어 각종 사물,즉 존재자에게 말할 수 없이 오묘하고 신비롭고, 실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내가 노래한다..고 했을때 이 노래함이 노래를 존재하게 만들고 모든 이들이 노래를 공감하게 만든다.. 라는 신비주의적 색칠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동사가 추상명사가 되어 신박한 힘을 갖게되는 마법처럼 말이죠…
[밴마철] 예 하이데거 존재론이 어렵고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이 있음이라는 존재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있음 앞에 살아 라는 말을 넣어 (살아) 있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농담조로 “안죽고 살아 있네” 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물리적으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뜻도 있지만 이것과 좀 다른 뜻도 있습니다. 어떤 기운 같은 것에 위축되지 않고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흔히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 존재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존재감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있기는 있지만 존재감을 발휘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있기는 있다는 것이 존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자에게 존재감이 없는 때도 있고 존재감이 있는 때도 있습니다. 존재자 안에 존재가 탈은폐하여 드러날 때도 있고 그것이 묻혀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아 있음의 존재감이 찾아지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과 맞설을 때 입니다. 지금 바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외적인 것을 다 무시하고 오직 자기자신에게 간절한 것만 남기려고 할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자기자신안에서 존재감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존재와 시간에서 말하는 존재입니다.
두번째는 외부의 어떤 것이 경이감으로 나에게 살아 있음 존재감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가 내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무언가가 나의 존재감을 촉발시키는 것입니다. 김춘수의 꽃, 고호의 구두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두번째입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목수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가 문득 그냥 좀 쉬는데 그의 눈앞에 이름 모를 작은 꽃에 꽂혀서 마음이 경이감으로 가득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꽃이 촉발시키는 몸짓으로 나는 나의 존재감으로 가득찰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신비스러운 이야기이지만 고개가 끄덕이게 되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존재감이 드러난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내부적 밝음 같은 것으로 이해 해 볼 수 있습니다. 외부적 억압이나 방해가 전혀 없는 상태 이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칸트의 공공적 사용으로 자유와 다른 것입니다. 사적인 사용으로 자유입니다. 억압이나 방해가 전혀 없는 것은 없음 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압이나 방해가 없는 무가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 자유가 나라는 존재자를 가장 나답게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나라는 존재자에서 그 존재감(존재)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하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술가의 삶들이 이런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 독일어: Dasein)라고 합니다. 이뜻은 우선 일본사람들이 번역한 현존재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현존재에서 현이라는 것은 드러내다는 뜻입니다. 현존재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앞서 살펴본대로 하면 꽃은 하나의 몸짓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촉발시킵니다. 그 몸짓을 나는 내가 가진 생각 나에게 있는 언어로 해석하여 그 꽃에 이름을 불러준다는 뜻의 의미부여로 존재를 들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Da Sein으로 보면 Da는 영어의 there의 뜻입니다. 현존재는 영어로 Being there 입니다, “저기 있음” 이라는 뜻인데 저기에 위축되지 않고 버젓이 서 있음의 뉘앙스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후기에 오면서 Da의 뜻이 열려져 있음opening의 뜻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꽃의 몸짓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면서 의미의 세계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하이데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는 것이 대충 이런 뜻입니다. 저기 버젓히 서 있으면서 자연이 촉발하는 몸짓들을 언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Da Sein 즉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하여 깊은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만이 이런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이 Dasein을 “터져 있음“으로 해석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말 ”터“라는 말이 there라는 말도 있고 opneing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비스럽고 어려운 점이 다 해소되기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존재(存在)라고 하면 그것이 마치 명사적 느낌을 가지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Being 이나 To be 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 동사의 명사형 동명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뜻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한번 경이감으로 가득찼던 마음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고 또 다른 경이감으로 채워지는 그런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탈은폐와 은폐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존재감은 고정된 형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얻어진 존재감이 쭉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살아 있다는 존재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위축되어 전혀 존재감이 드러나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저는 불교의 깨달음도 이런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모든 것아 해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다와 없다는 굉장히 역설적이면서 신비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제기한 것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없다” 가 아니고 “있다”인가? “있다”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 이것을 간단히 하면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 라는 것이 됩니다. 정말로 어렵고 신비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따라가면 고개가 끄덕이게 되는 점도 있습니다. 우선 있다는 존재자와 있게 하는 존재가 구분된다는 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으니 대충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있다는 존재자가 참으로 그 뜻을 다하여 있는 것이 되려면 거기에 어떤 간섭이나 방해 구속 같은 것이 없어야 있다는 존재자가 아무런 위축됨없이 그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있게하는 존재가 거의 무와 같은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아무런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와 무는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관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아무런 규정성이 없는 없음 속에 있는 있음이 참으로 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규정성이라는 것은 어떤 틀을 상정하고 억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야 진짜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노자에 나오는 말 ”도가도 비상도“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는 뜻과 비슷합니다. 도라는 것이 말로 하여 어떤 규정성을 가지게 되면 있는 것들(존재자)를 어떤 틀로 밀어 넣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아무런 규정성이 없어야 아무런 틀이 없어야 있는 것들이 참으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없음 속에서 있음“ 참으로 역설적이고 신비롭지만 고개가 끄덕이게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 속에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끝이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의 삶이 그만큼 중요하고 간절해 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천당이나 윤회같은 내세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현재의 삶을 거기에 맞추는 틀을 상정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 아니라 “다음 저기“를 위해서 현재의 자기의 삶을 어떤 틀에 밀어 넣어 구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제 이야기한 니이체의 영원회귀 같은 것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 저기를 위해 지금 여기의 삶을 유보하고 참아내는 것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니이체나 하이데거가 다 맞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참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독일 관념론idealism에 대해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핵심은 idea 계나 기독교의 천당을 이 지상의 세계에서 구현해 보자는 뜻을 가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의 끝판왕이 공산주의 공산사회일 수 있습니다. 과학과 민주로 먹고 사는 생존적인 욕구와 공공적 자유로 인해 기본적 인권이 보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천당에 도달했는냐? 혹은 그것으로 천당에 도착할 수 있느냐? 그런 문제가 남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유의 사적 사용에 대한 의미를 찾게되는 것이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Jack Shin] 존재와 무 라는 것은 있음과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 존재라는 있음의 은폐와 탈은폐가 있다면, 없음인 무의 탈은폐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있음은 없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없음 또한 있음에 그 근윈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탈은폐는 무의 은폐이다. 뭐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없음을 가리거나 은폐시키려면 있음인 존재가 나타난다. 그런데 존재는 있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결국 존재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니, 존재의 개념이 좀 애매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