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redemption 은 어제의 나를 청산하고 오늘 새로운 나로 결단한다는 뜻을 가집니다.죽음과 탄생을 단지 생물적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어제의 나를 죽이고 오늘의 나로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탄생이 서로 맛물려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탄생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정반대의 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 서로에게 속하여 있다는 말을 공속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존재자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부정을 무화無化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한 무화를 통하여 나의 참모습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화와 존재는 죽음과 재탄생처럼 서로 공속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있음이라는 존재와 없애감이라는 무화가 서로 반대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보완적이며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논리에는 헤겔의 변증법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헤겔에서 자세히 할 예정이지만 여기서는 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A라는 것과 A가 아니라는 non A라는 것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습니다. A는 A이지 결코 non A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형식논리학이라고 합니다. A와 non A가 서로 배척하는 관계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변증법은 A에는 non A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으로 인하여 A가 성립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언뜻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말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단맛이 나는 하얀 백색가루의 설탕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단맛이 단맛자체로 성립한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쓴맛 신맛 떫은 맛과 비교를 통하여 단맛이 성립하는 것이지 단맛 자체로 단맛이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세상에 단맛만 있었다면 맛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단맛과 단맛이 아닌 것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도 있지만 단맛이 아닌 것이 단맛을 성립시키는 도움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얀색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하얀색만 있다면 하얀 색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탕가루는 설탕가루가 아닌 그 비슷한 소금 그런 것과 비교를 통하여 그 설탕가루라는 개념을 가지게 됩니다. A라는 것은 non A의 도움 속에서 비로소 A라는 것이 성립합니다. 이것을 변증법에서 상호배척침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배척은 서로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침투는 서로 보완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것이 궁국적으로 통일을 이룬다고 하는데 하이데거나 그를 계승한 데리다는 그것들의 통일은 말하지 않고 상호보완적 관계만 있다고 말합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 뒤에 나오는 사람이지만 하이데거의 공속이라는 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데리다 이야기 좀 해 보겠습니다. 데리다는 짧은 것과 긴 것과 같이 서로 대립하는 두 항을 이항대립 binary라고 합니다. 짧은 것은 성립하려면 반드시 긴 것이라는 전제되어야 합니다. 긴 것 없이는 짧은 것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짧은 것이 우리의 머리 속의 수면 위로 들어 나 있다면 긴 것이 우리의 머리 속 수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눈 앞에 보이는 것 그것을 현전presence 합니다. 그 현전의 배후에는 그것 아닌 것 이것을 부재absence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전presence는 부재ansence가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자주 보셨을 그림으로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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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누루시면 크게 보입니다. 유리잔으로도 보이고 두 사람의 얼굴을 맛대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것이 유리 잔으로 현전presnce하려면 두 사람의 얼굴이 부재absence의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두 사람의 얼굴이 현전하려면 유리잔은 부재의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부재가 현전을 성립시킨다는 뜻입니다.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무의 공속관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는 절대적 무가 아닙니다. 단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 현전하지 않은 것을 무라고 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무는 현전의 부재이다라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이지만 지금까지 한 내용으로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실 탈은폐와 은폐도 바로 이 현전과 부재라는 뜻과 거의 같은 것입니다. 탈은페라는 드러남과 은폐라는 숨김이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입니다.
용수의 공사상에는 이런 데리다의 binary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니다. 생사윤회와 열반해탈은 둘이 아니다. 이런 말들도 다 위에서 말한 그런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유와 무는 한 곳에서 나와 이름만 다를 뿐이다. (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 위에서 나왔던 유용은 무용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이런 것과도 모두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주 했던 것이지만 이것은 불교 보왕 삼매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V7ici3WM1wo&si=2zeVuQFjx4d2mkVO
하이데거는 삶과 죽음 이런 것을 존재와 무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삶을 극명하게 드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죽이고 오늘의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실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몇번 말씀드렸지만 existence 라는 실존은 벗어난다는 ex 와 서 있다는 stand가 합성된 것입니다. 비켜 서있다는 것인데 어제의 삶에서 곁으로 빠져 나와 서 있으면서 새로운 미래를 결단한다는 뜻잊니다. 어제를 죽이고 오늘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이 꼭 하이데거가 한말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이미 있었던 것 아닌가? 아래에 올릴 동영상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죽음의 장례식에 성적sex를 결부시킨 놀이를 결부시킨 다시래기 놀이 판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시래기는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장례식에 성적sex를 결부시키면서 새로운 탄생을 축하하다는 그런 역설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https://youtube.com/watch?v=Apyzz42JRB0&si=kk_n2iLdXq2XNCP_
있음과 없음을 절대화 시켜서는 하이데거 존재와 무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헤겔이 말한 순수 유는 무이라는 논점에 서 있어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순수 유는 무이라는 것을 받아 들이게 되면 무는 무규정적인 것이 되고 유는 규정적인 것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말하면 유는 눈 앞에서 보이는 현전이고 무는 눈 앞에서 보이지 않는 부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뜻이 드러남의 탈은폐이고 숨겨져 있음의 은폐입니다. 애초에 순수 유는 무이다는 것으로 유와 무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 현전과 부재 탈은폐와 은폐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상호보완적 공속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이것으로 생성과 소멸 죽음과 소멸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면서 날마다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면서(무화 시키면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남(살아있음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존재와 무는 상호보완적 꼬리를 물고 있는 공속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