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0.28 토.하이데거.존재.존재자.현존재.탈은폐.노자.무위자연.

by 마철방 2023. 12. 28.

[밴마철] 이전에 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being there입니다. 저기 저렇게 기 안죽고 벗젓히 서 있으면서 자기의 존재(자기의 살아있음을 느끼고 이해하며 가지는 존재감)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현존재입니다. 여기서 존재자beings와 존재Being의 구분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있게하는 것입니다. 살아있게 하는 것(존재)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존재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에 빠져 있을 때는 그냥 존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삶의 의미로서 존재(자기가 살아있음으로서 존재감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 죽음을 직시해 보는 불안이 엄습했을 때는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대답하려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존재가 드러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 경우를 일상에 빠져있는 존재자를 부정하고(무화시키고) 새롭게 존재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화를 통하여 존재자를 부정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존재자와 존재가 구분된다는 점을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하는 하이데거 전기사상입니다. 

 

후기 사상은 인간이 존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인간에게 찾아 오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때 인간 존재 Dasein에서 Da는 그렇게 찾아 오는 존재에 대하여 그 존재를 받아 들일 수 있게 열려있다는 강조합니다. 그랬을 Da는 opening이 특징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쇼생크 탈출 영화에서 피가로 결혼 편지의 이중창을 한번 생각해 보지요. 잘 아시겠지만 피가로 결혼은 음모적인 애정행각 입니다. 주인 백작이 여자 하인을 꼬셔서 어떻게 해 보려고 수작을 벌이고 여기에 대응해서 백작부인과 여자 하인이 그 백작을 골탕 먹이기 위해 쓰는 편지를 쓰는 내용으로 부른 노래가 피가로 결혼 편지의 이중창입니다. 이것이 무슨 자유이지 존재감을 찾자는 것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노래를 듣던 레드는 이탈리어로 노래하는 여자들이 뭐라고 씨불이는 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노래의 선율이 자기에게 다가 왔을 때는 자유에 대한 희망을 가득채워 자기의 살아있음의 존재감을 불러 일르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죄수로서 존재자에게 존재감이 찾아 오면서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음악의 선율을 단지 존재감을 촉발시켰던 역할을 하였던 것이고 그 존재감이 자기에게 가득찬게 된 것은 그 촉발된 존재를 받아들여 자기의 존재감으로  해석하여 자기 자신을 존재로 채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인가? 흑인 죄수 레드라는 존재자를 가장 레드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가 탈은폐했다고 말하는 것이며 레드라는 존재자를 가장 레드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레드라는 존재자를 가장 레드답게 만드는 것이 존재입니다. 고호의 구두도 이런 것입니다. 사실 고호의 구두의 주인공은 남자라고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호의 구두는 fact는 아닙니다. Fact와 상관없이 자기에게 삶의 의미로서 존재감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했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는 노자가 말하는 도와 상당히 유사점이 있습니다. 노자의 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위라는 것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이 무위자연의 도라는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자기의 자리를 가장 잘 찾아 스스로 그 본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해 준다는 뜻입나다. 다시 말하면 만물이라는 개별 존재자가 가장 그 존재자 답게 해 주는 것이 무위자연의 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꽃이 있다면 그 꽃이 가장 그 꽃답게 해 주는 것이고 잡초가 있다면 그 잡초가 가장 그 잡초답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요. 무위라는 하지 않는다는 말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와 통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시키는 것으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라는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다는 무위와 그렇게 하도록 한다는 자연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공속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릇 안의 비어있음이라는 무가 그 그릇의 이용이라는 유를 있게 해 주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하이데가가 말하는 무와 존재도 이 무위와 자연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칸트를 하다가 갑자기 하이데거로 빠졌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에서 자연 자체는 물자체이고 그 물자체가 감각기관에 무언가를 촉발시켜 감각내용의 상이 만들어지고 초월적 구조가 그 상에 개념을 부가하면서 과학적 법칙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물자체를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칸트의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이 하이데거에서 존재입니다. 칸트에서는 물자체에서  촉발된 것을 현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 현상은 존재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칸트의 목적은 중세의 미신적 생각을 일소하는 근대과학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 내부에 있는 초월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하여 결국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로 말하고 싶어 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특히 그 삶에서 예술적 삶이…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을 요약해 말하면 외부에 있는 어떤 근원적 존재가 모든 존재자를 가장 그존재자답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해방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존재라는 것이 결국 신God를 말하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 궁극적 의미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면서 고통의 해방과 자유를 누르게 해 주는 초월적 존재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밀고 나간 것이 폴 틸리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그 초월적 존재를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혹은 존재 자체Being itself  혹은 Ground of being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데 하이데거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논점이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모든 종교는 이 존재 자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존재 자체가 산 정상입니다, 그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이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의 제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통합될 수 있고 화해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을 無爲之爲(무위지위)라고도 합니다. 해석하면 하지 않는 것으로 함 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지 않음이라는  무위無爲와 함이라는 하는 有爲(유위) 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이지만 그 내부의 상호침투 상호보완으로 묶이게 되는 공속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있음과 없음 무와 존재가 공속관계에 있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제우가 제창한 동학에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것을 말합니다. 무위라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화라는 것은 변화를 이르킨다는 뜻입니다. 한울님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이르킨다는 것입니다. 무위자연  무위지위 무와 존재의 공속관계 무위이화(無爲而化) 다 같은 뜻을 가진 것이고 이것들은 쇼생크 탈출에서 흘러 나오는 피가로 결혼의 노래를 듣고 자유의 희망으로 가득찬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모습에서 그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존재자가 어떤한 구속도 없이 어떠한 것에도 기가 눌려 위축되지 않고 가장 그 존재자답게 되는 것은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가 가장 잘 발현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가 존재자 안에서 탈은폐하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늘 씨앗 만들다 잠깐 짬이 나서 생각나는 것 하나 더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이 한 다석 유영모 선생님 말한 “없이 계시는 분” 을 한번 생각해 보지요. 없이라는 것은 없음의 무입니다. 계시다는 있음의 유입니다. 이 둘이 공속관계로 있는 것이 “없이 계시는” 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분”이라는 것은 그것을 종교적 대상으로 인격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와 공속관계에 있는 존재를 인격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이야기는 일본사람들이 특히 일본의 경도학파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나 도교 같은 것을 하이데거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매우 컸습니다. 또한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상적 근거로 에크하르트를 말하니 경도학파에서 에크하르트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저는 유영모 선생님의 “없이 계시는 분” 혹은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러한 사상적 배경를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