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예 자주 좀 끼어들어 주시면 너무 좋겠습니다. 저만 혼자 이야기하면 메아리 없는 소리로 공허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회가 공적 자유에서 사적 자유의 중요성으로 좀 이동하고 있다는 것 저도 실감합니다, 그런 뜻으로 니이체를 잘 정리해 주셨네요. 왜 요즘 와서 사람들이 니이체에 열광하는가?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헤겔 맑스가 유행이던 시절에는 니이체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진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사회의 현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불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단체로서 불교는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쇠락의 길로 들어 섰지만 개개인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는 것으로 불교는 더 늘어 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에 제 개인적인 체험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나이들면서 그 사적 자유의 중요성이 더 커져간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어찌하여 이제까지 살아 왔고 이제는 큰 욕심 희망고문에 빠지지 않고 내 마음대로 좀 살아 볼 수 있는 조그만 틈새가 생겼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좀 소중히 여기며 가꾸다가 가는 것이 남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큰 축복이고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동영상이 있어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g5MBp04Nu0M&si=38iyxF4TiFJyGf6o
밴쿠버 오기 전에는 나름 바빠서 음악이나 영화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밴쿠버에 오고 나서 시간도 많으니 여러가지 혼자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해뜨는 집의 노래를 여러버전으로 들어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전에 한번 언급했던 오코노의 버전도 좋아 합니다.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aWh-i1dn0tg&si=5eSSbxJuGkfI7f-_
예전 한국 있을 때 옆집 사는 선배가 있었는데 경희대 후마니타스( Humanities 인문학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창립하면서 노숙자나 교도소 수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고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한 때 이 후마니타스라는 것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원래 뜻은 인문학인데 나중에 좀 변형되어 교도소나 홈리스를 대상으로 자기 존엄성을 일깨우는 것을 후마니타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그 선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맑스 엥겔스로 철학박사(성균대)를 받고 그랬는데 갑자기 기공 단체로 들어가 신비주의를 논하여 옆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따라서 좀 다녔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선배가 쓴 짧은 글이 있어 공유해 봅니다.
https://preview.kstudy.com/W_files/kiss6/34000891_pv.pdf
교도소나 홈리스들을 위한 후마니타스로 제일 각광받는 철학자가 니이체입니다. 니이체가 철학이 인간의 자기 존엄성 자존감을 일깨우는 것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홈리스 보고 있으면 이 문제가 공적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지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먹고 잠자게 하는 것으로 공적 시스템이 역할을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적 자유를 통한 자기 존엄성 같은 것이 논의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홈리스가 아니더라도 늙어가면서 노추에 빠지지 않고 자기 존엄성을 지키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에서 올린 홈리스 뉴욕커에서 사랑의 집 원장님 사모님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에 사는 할머니보다 더 한국적 할머니의 인상 뭔가 내공이 매우 깊어 보여,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선생님이 지적하였듯이 니이체 철학 핵심 중의 하나가 “지금 여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의 출발점은 키에르케고르에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finiteness과 진정성authentication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한성이라는 것은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한 개인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 너머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죽으면 끝이고 그만이다는 뜻입니다. 이 뜻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자각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저기에서” 보상은 의미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 헤겔철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세계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유한성에는 또다른 뜻이 있습니다. 유한성도 무한성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은 신과 같은 무한성의 세계입니다. 이 뜻은 인간이 바로 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케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유한하게 주어진 시간 안에 그 영원한 무한의 세계에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은 구분된다느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은 저 무한한 영원에서 유한한 인간쪽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영원한 무한 전체에 도달할 수는 없고 단지 그 영원의 바람의 일부를 맛 볼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뜻입나다. 그리고 이것을 순간에서 영원의 포착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진정성이 문제가 됩니다. 칸트나 헤겔이 말하는 공적 자유는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뜻과 같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칸트나 헤겔의 말하는 자유는 객관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절실한 것은 진정성이 바탕이 되는 주관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일 좀 더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