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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화.헤겔.법철학비판.마르크스.르쌍티망.이성.역사철학

by 마철방 2023. 12. 29.

[밴마철]

https://youtube.com/watch?v=rS3wOvAY4eY&si=tGToV-tt_qsVEpEb

 

새벽에 깨서 이 노래를 듣는데 너무 노래가 좋아 공유하게 되네요. 그리고 가사도 너무 좋아 공유해 봅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ebnii&logNo=22024515709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a%2F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 There wi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 Agnes Baltsa 아그네스 발차

Ασπρη μέρα και για μας (Aspri mera ke ya mas) There will be better days,...

blog.naver.com

 

이 가사를 보니 어제 했던 맑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 글이 떠 오릅니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의 요구이다.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종교의 비판은 맹아적으로, 그 신성한 후광이 종교인 통곡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절이 바로 위에 있는 글입니다. 보통 우리는 마약이라고 하여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 당시 아편은 마약이라기 보다 진통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종교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뜻이라기 보다 어떤 비참한 상태 때문에 종교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비참한 상태를 프로레탈리아 혁명 같은 것으로 해결하여 더 그 비참한 상태를 없게 해야 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https://youtube.com/watch?v=BzjEJxejYoc&si=Slw5eD7dU0-smL0d

 

바그너의 순례자의 합창입니다. 바그너와 니이체는 한 때 의기투합하였는데 바그너가 이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린 것을 보고 니이체는 바그너에 실망하여 서로 멀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즉 바그너의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헤겔의 철학이 연상되고 니이체는 바그너가 헤겔로 돌아갔다고 본 것입니다.

 

순례자가 방황하다가 결국은 자기 고향 집으로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떤 순결한 민족이 있는데 내부의 문제 외세의 침략 이런 것으로 방황하다가 결국은 이런 것 다 극복하고 그 민족의 순결성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지요. 히틀러가 이 바그너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고 합니다. 순결한 독일 아리안 인이 내부적으로 유태인에 의하여 더럽혀지고 외부적으로 쏘련의 돼지같은 공산주의에 위협당하게 있는데 이런 것 다 물리치고 아리안인은 결국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 이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전통 천황으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 그리고 일본은 어떤 다른 피도 섞이지 않은 그 천황의 순결한 자손으로 일치단결하여 짐승같은 영국 미국을 물리쳐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아시아를 이끌어 갈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식의 민족역사 교육으로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면서 태평양전쟁으로 국민들을 몰고 나갔지요. 이전에 우리가 우찌무라의 두 개의 J ( Jesus and Japan) 를 살펴 보았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은 위의 순례자의 합창을 떠 올리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이성reason을 한번 생각해 보지요. 개인적 생명욕구가 변증법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통해서 상호인정하는 “나 속의 우리” “우리 속의 나”로의 전환되었을 때 그것을 이성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속한 공동체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나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그것이 이성reason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바로 역사 특히 민족적인 역사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헤겔은 역사철학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이체가 보기에는 이런 것이 사기라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의 원형이 유태교와 기독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이 아닌 신화를 역사로 포장하여 스스로 자신의 의무 책무를 떠 안으며 금욕주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즉 허구의 짐을 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순례자의 모양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짊어지면서 나는 순결한 사람으로 너희들과 다른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더러운 시궁창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르는. 병신이라고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한적 감정을 니이체는 르쌍티망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나는 순결한 사람이고 너는 더러운 놈이라는 것이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찌 되었든 니이체는 헤겔에서 역사 이성이라는 허구의 짐이 생명의지를 억눌러 버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허구의 짐을 벗는 것 즉 이성을 해체하는 쪽으로 그 철학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전에 했던 맹자의 말이 다시 떠 오릅니다.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필유사언이물정 심물망 물조장) 만나게 되는 일에 집중하여 열심히 하되 그것이 반드시 마음 먹은 대로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라. 그렇다고 하여 마음 속에서 해야 할 일까지 비우지는 말아라. 그리고 억지로 키우려고 하지 말라. 저 위에 아그네스 발차 노래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를 저는 이 맹자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식의 민족정신의 역사가 프로레탈리아 해방의 역사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유물론적 변증법 역사이지요. 민족정신의 역사가 주인의 역사이라면 프로레탈리아 해방의 역사는 노예가 스스로의 쇠사슬을 끊고 주인으로 올라서는 그런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예시대—봉건시대—자본주의 시대—공산주의 시대 라는 법칙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민족정신의 역사가 프로레탈리아 해방 투쟁의 역사로 바꾸어져 한다는 것에서 이 둘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역사 이성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니이체가 수행한 헤겔의 역사 이성에 대한 비판은 맑스보다 앞에 나온 것이지만 니이체의 역사 이성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에도 유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저 위에 올렸던 홍윤기의 황장엽 회고록이 다시 떠 오릅니다. 80년대 선배들과 같이 세미나하면서, 비분강개 하며 그 세미나 실의 문을 나서면서, 순례자의 전사로 살아야 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떠 오릅니다. 세상의 모순이 다 보이는 것 같고 그 모순이 어떻게,해결되어야 할지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다 안다는 착각을 가졌던 때가 아련히 떠 오릅니다. 그것이 다 부질없었고 나빴다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성장통 아니였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논리로 북한의 주체철학을 보면 그것이 유물론적 역사법칙보다는 민족정신을 고양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단군릉을 발견했느니 김일성의 항일 운동 같은 것이 많이 과장되어 있음을 알고 실소를 머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허구의 짐을 무겁게 지고 남조선 괴뢰도당 짐승같은 미국놈들 이라고 욕하며 자신들의 순결적 단결성을 취하고 있는 르쌍티망의 현장을 보면서 사람들이 저렇게나 어리섞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좀 깊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좀 깊이 드러다 보면 그것이 허구 아닌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 어떤 사실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 어떤 이념에 짜 맞추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허구의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니이체의 깊은 통찰에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저기 위에,르쌍티망 설명하는 부분이 잘 못 되었네요. 그런 고통을 짊어지면서 나는 순결한 (사람으로 너희들도 다른 ) 깨끗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더러운 시궁창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르는. 병신이라고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 )괄호 친 부분이 빠져야 하겠네요. 

 

[Jack Shin]  이성이라는 것이 본능에 충실한 밥그릇 법칙을 뛰어넘어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보는데, 헤겔의 개념은 좀 다르군요.  나속의 우리, 위리속의 나 라는 변증법적 상호인정을 이성이라고 본다면 개미나 벌이 더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