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마철] 저기 나중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 대지의 나라에서 자유와 기쁨이 획득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이체 철학의 핵심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도 니이체처럼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회퍼입니다. 니이체철학으로 무장하여 나치의 독재와 싸우다가 39살에 죽은 본 회퍼는 사신론(Dead of God)를 열면서 폴 틸리히 영성 신학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몰트만이라는 현대 신학의 대가 쓴 니이체와 본 회퍼의 글이 있어 올려 봅니다. 글이 상당히 유려하고 깔끔합니다.
http://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special&wr_id=338&main_visual_page=gisang
디트리히 본회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특집 | (재)기독교서회
개인적 평가 다트리히 본회퍼는 20세기 독일출신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이다. 폴란드에서 한국에 이르기까지 본회퍼 학회들이 조직되어 있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에는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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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이해하는데 다음의 동영상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려 봅니다.
https://youtube.com/watch?v=2nyE22xW1Io&si=v8vWPZFaPUXldokS
아메마의 운동은 자기를 보존시키기 위해서인데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서로 경쟁하지만 결국은 어느 한 방향으로 갑니다. 이렇게 가는 방향이 미리 설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 반목적론입니다. 전체의 코나투스가 아메마 전체운동이라면 부분적으로 이리 가려고 저리 가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개별적 코나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 설정이 코나투스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펙투스라는 외부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은 개별적 코나투스들이 자기를 드러내려는 표현들이 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전체의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방향이 제대로 되려면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가 중요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개별적 코나투스가 서로 경쟁하면서 전체가 제대로 가는 길을 찾아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개별적 코나투스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전체의 운동에 저절로 휩쓸려 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별적 코나투스의 자기 중심적 운동을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태극기 부대나 개딸들의 현상은 이성적 접근이 불가능하고 감성적 접근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상대방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또 극도로 충성을 바치는 것들은 외부적 에네지인 에펙투스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내부에너지로 코나투스의 방향이라는 것은 그 스스로가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에펙투스라는 외부에 에너지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외부 에너지 영향을 받으면서 그 방향을 찾는데 서로 경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만 제대로 실현된다면 극단적인 것들은 저절로 소멸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스피노자의 논리인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극단적인 것들이 제풀에 껵여 소멸되는 자체 자정능력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실은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렸듯이 현대철학의 방향 중의 하나가 어떤 잘못된 방향에 대하여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목표는 제시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틀린 방향들이 비판받으면 저절로 가는 방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어떤 방향을 제시라고 그 길로 모두 함께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저기 위에 본 회퍼 글이 길면 “땅의 성실성”부분만 읽어도 좋습니다. 니이체의 대지의 철학의 의미를 너무 잘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몰트만의 글을 다른 곳에서도 보았는데 이 땅의 성실성 부분만 삭제해 놓았더라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전체적으로 니이체의 영향이 있는 것이 니이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좀 더 검색하다가 이 글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떤 곳에서 제목이 “ 대지의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라고 된 것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니이체 철학은 몸이 세계를 해석하는 최종 근거이고 그 때문에 결국은 다원적 관점주의(perspectivism)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야기가 현실화된 것이 지금의 인터넷 환경이라고 니이체 연구자들은 말합니다. 인터넷 유튜브 보면 각종의 관점에 따라 각종의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거기에는 선동적인 가짜 누스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나 니이체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저기 아메마 운동 보면 그 안에 작은 점으로 된 세포들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것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방향을 만들어 갑니다. 아메마의 작은 점들처럼 각자의 의견이 다르지만 그것들이 서로 관계하면서 전체 방향을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너무 지나친 것들은 껵여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말하면 아메마 전체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자연이 바로 신이고 실체입니다. 그 자연 전체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운동을 하는데 그것이 전체 코나투스입니다. 그 안애 작은 점들은 개별적인 것으로 전체에서 온 자기의 코나투스입니다. 그것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자기의 코나투스를 표현하려고 하지요. 이런 것들을 양태mode라고 합니다. 이런 경쟁은 결국 전체 코나투스의 표현과 관련된 것입니다. 전체는 독립적인 실체이지만 그 안에 있는 양태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있는 것입니다. 양태들 사이에는 코나투스와 에펙투스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지게 하소서.” 라고 하면 하늘은 연극의 감독 혹은 연극의 대본이 되고 땅에 있는 것들은 그것의 꼭두각시 배우가 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자유와 기쁨도 없고 그 감독을 위한 자유와 기쁨만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니이체가 말하는 대지의 몸을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나의 삶의 감독이고 대본이고 배우라는 것이고 그 자유도 나의 것이고 그 기쁨도 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를 숙고하는 사유 혹은 명상적 사고(meditation thought) 라고 하고 이것에 대비되는 것으로 과학적 사고 계산하는 사고(calculation thought) 라고 하였습니다. 이 계산적 사고가 필연적 원칙이 되어 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감독이 아닌 배우로 전락시킨다는 것입니다. 계산적 사고의 최후의 결과물로 돈이라는 것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벗어나 보려는 것이 명상적 사고이자 심연의 자유를 찾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 무에 근거한 존재를 말하여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유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 신비 영성은 같은 뜻을 가진 것으로 결국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땅에서 대지에서 자유롭자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은 자유에 대한 명상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일 혹시 동지 팥죽 모임에 참석하실 분들 좋아요 표시 한번 씩 해주시면 감사라겠습니다. 음식 량을 가늠하기 위해서입니다. 준비물 없이 그냥 가볍게 오시면 좋겠습니다.
자유의 근거로 심연abyss를 말하면 저절로 불교의 공이 연상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내일 모임 혹시 비가 와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비가 오면 지어 놓은 창고에서 난로 피우며 빗소리 듣는 것도 운치있습니다.
[Jack Shin] 네, 수고와 번거로움에 감사드립니다 ㅎㅎ 내일 뵙겠습니다
[Hwang jisook]
Jack Jasmine elly and mike 이옥금과 부군 저도 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