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2. 9 토 아리스토텔레스.목적론.기계론.칼포퍼.과학.철학.실체.연장

by 마철방 2024. 1. 14.

 [오전 8:23] https://youtube.com/watch?v=V4UoD7HK4Sw&si=C8rRQMVafnCM_d7H

 

[밴마철] [오전 8:33]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자가 아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예 핵심은 바로 그의 목적론적 자연 설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째든 이 이야기는 조금 미루고 과학은 100% 이 완벽한 것이 아니고 100%의 완벽성을 주장한 것은 오히려 신학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취지가 재미있습니다. 제가 본 우리나라 과학에 관한 유튜브등도 대부분 이런 입장에 서 있습니다. 천체 우주론을 설명하는 카오스 재단의 유튜브도 그렇고 박종화 교수 dna에 설명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이론적 기반은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칼 포퍼의 과학관에 기반한 것입니다. 

 

칼 포퍼는 영국의 경험론 특히 흄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과학은 100%가 아니다. 100%는 종교적 설명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오늘 날 하루에도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논문들은 기존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면 논문 게재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든 기존 이론과 좀 다른 이야기 혹은 기존 이론을 비판해야 논문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학은 오류 가능성 혹은 반박 가능성인 Falsifiability를 열어 두어야 합니다. 반면에 신학은 진리의 절대성을 믿는 것으로 오류 가능성을 제외시키는 닫힌 체계입니다. 종교적 경전에서 오류를 찾으면 그 자체로 그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표시로 그 그룹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칼 포퍼는 원래 맑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맑스즈의자들이 그들의 역사법칙을 절대화하여 열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열린세계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플라톤 기독교 맑스주의 등과 같이 진리를 절대화하여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들을 닫힌 세계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과학에도 적용시킨 것입니다. 

 

내년에는 비가 온다고 말했다면 거의 100%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증거를 가지고 내년 1월 1일 비가 온다고 하면 틀릴 가능성이 엄청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설명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다는 라는 말은 100%맞는 말입니다만 사실 하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정보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질환으로 1년 안에 죽는다고 하면 틀릴 가능성도 있지만 어떤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보 그리고 정확한 정보는 항상 그 만큼의 오류 가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백조는 희다라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레일아 근처에서 검은 백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백조는 희다는 것은 폐기되었습니다. 칼 포퍼는 과학도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과학이론은 그 오류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잠정적으로 맞는 것으로 간주하다가 오류가 발견되면 그 이론은 버려지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이론도 거기서 누군가가 오류를 발견하면 그 이론은 폐가되고 새로운 이론이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과학이론은 가설적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실과 대조해 보았을때 맞아 들어 갈때만 잠정적으로 진리 취급을 하고 거기에서 오류 찾기에 주력하여 오류가 발견되면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과학자들은 과학을 100%생각하지 않는 것이 많은데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과학을 100% 생각하여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것은 과학을 종교화하여 스스로 닫힌 세계에 갖히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의 동영상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자라고 말하는 것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뉴턴이 이론이 100%가 아님이 밝혀졌다고 해서 뉴턴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 이론이 도전 받고 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째든 아리스토텔레스를 과학자로 보는 견해도 좀 소개하겠습니다.

 

 [오전 9:35] https://youtube.com/watch?v=TquVg9FYUkc&si=y9qOHepmKox15L4g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581540&memberNo=16714554

 

이 세상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고?

[BY 윌북]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양자역학 미국사람들이 인정하는 똑똑한 미국인이자 노벨...

m.post.naver.com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위의 동영상은 내용은 나중에 좀 더 살펴 볼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글 하나 올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위의 글을 보면 과학은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어렵고 우리가 앞으로 좀 해야 할 핵심입니다. 

 

[Jack Shin] [오전 10:22] 요 대목에서 철학과 과학에 대한 비교를 하고 싶네요.

과학은 물증이 없으면 모르겠다 라고 하고 철학은 물증과 상관없이 이렇다 라고 주장하지요.

 

헤겔의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론 이라든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 등이 그렇지요. 철학이란 가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발 인간은 동물과 달라 이렇다 라는 말은 말아 주세요.

 

이것은 과학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인간만이 될 수 있다든가, 인간이 존재의 목동이라든가 하는 말이 헛소리로 들립니다 ㅠㅠ

 

[밴마철] 예 문제 제기를 잘 해 주셨네요. 보통 철학을 과학과 신학의 중간 단계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근대철학이라는 것은 과학을 신학으로부터 분리하여 과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데까르트라고 할 수 있고 과학적 물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그가 말한 물증이라는 것은 바로 물질이 가지는 연장성입니다. 연장extend라는 것은 늘이다는 뜻이지요. 모든 물질은 어떤 최소 단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늘이거나 줄이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물질은 보통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기는 그것의 기준인 m가 있고 그것을 cm mm 등으로 줄이거나 km 등으로 늘이면서 그 크기를 수학적 량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게의 g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도 db로 그렇게 할 수 있고 색깔도 파장의 단위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복잡한 것도 최소 단위로 분해하고 다시 결합하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어떤 기계와 같은 것으로 그것의 작동은 수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학적 원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것이 정신입니다. 정신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물질과 같이 크기나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쪼개서 분해했다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비 연장적 실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딱 두가지의 실체가 있습니다. 세상은 수학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연장적 실체가 있고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정신의 실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수학적으로 표시가 안되는 물증들은 철학에서(과학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계론적 결정론의 발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나 목적 같은 것을 찾자는 것과 결별하는 순간입니다. 목적론을 배제하고 기계론적 세계론의 문을 열게 한 것이 근대 물리학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세계는 수학적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기계처럼 움직인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증적 증거라는 것은 수학적 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연장적 실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중요한 것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현상appearance 많이 했지요. 물자체thing itself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에서 물자체는 알 수 없고 단지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력이 왜 있게 되는지 중력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런 것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용인하면 문제가 신학으로 넘어가 신을 끌어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이 성립하려면 신학적 목적론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인간이 가진 이성능력의 초월적 원리에 의해 수학적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앎을 제한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들을 수학적으로 표시하여 그것이 어떻게 How 로 작동하는가? 를 설명하려고만 해야지 그것 너머 중력이 왜 있어야 하는가 why 혹은 중력은 무엇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가? For what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것은 순수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월권행위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만 있어야지 그것 너머를 추구하면 신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어떤 것을 먹어 보고 이것이 맛있네 라고 말하면 과학적 물증의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것의 ph는 얼마이고 당도는 얼마이고 이런 식으로 수학적 량으로 표시할 수 있어야 과학적 물증이 되는 것입니다. 보는 색깔도 마찬가지이고 듣는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물증이라는 것은 바로 데까르트가 말한 연장적 실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학의 덕분에 묵적론적 미신적 사고를 벗어나고 또 생산량도 비약적으로 늘어 생존의 위협으로 벗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전부이다면 사람은 기계처럼 불평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맛이 아니라 소비해야 할 열량 에네지를 계산하여 먹고 또 공장에 가서 규칙적으로 일하고 집에 와서도 열량 대비로 먹고 쓸데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 같은 것 먹지 않고 내일을 위해 충분히 쉬어 에너지를 보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시계처럼 자동 기계처럼 사는 것에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계처럼 필연적 원리에 사는 것을 지겨워하고 탈출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자유를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그럼으로써 이제 철학이 그런 필연적 과학적 원리에 지배받는 삶에 반성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군대가면 그런 이야기합니다. 충분히 먹여주고 따뜻하게 재워주고 옷주고 규칙적인 운동시켜주는 이곳이 낙원인데 무슨 불평불만이 있느냐? 그래도 불평불만이 있는 것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