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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월.대승기신론.유전연기.성선설.민주주의.일본근대사.신영복.우찌무라.막스베버

by 마철방 2024. 1. 29.

[밴마철] [오전 6:46] 제가 대승기신론을 꺼내 놓기는 하였는데 솔직히 좀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너무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대승기신론을 번역한 은정희 선생님 저의 지도교수 윤사순 그리고 대승기신론의 학위 준비하는 대원생들과 성철선사상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한 3년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도통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지도 못했습니다, 은정희 선생님은 그 이전에 있었던 김달진 그리고 탄허스님의 번역을 바로 잡아 대승기신론의 번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분으로 평가받았지만 같이 이야기 하다보면 그 내용을 다 파악하고 계시지는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용어가 너무 어렵고 내용도 너무 복잡합니다,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쟁이 지금도 끊임없습니다. 하여간 문제를 꺼내 놓았으니 저의 주관적 생각을 몇가지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너무 어려운 용어는 그냥 패스할 것이고 제 말이 대승기신론의 객관적 이해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면서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밴마철] [오전 7:06]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의 내면에 탐진치라는 무명이 있음을 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무명이 인간을 어떻게 고통으로 몰아 넣는 지를 통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한 무명을 어떻게 끊어가는 지도 말씀한 것입니다. 보통 무명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과정을 유전연기라고 하고 그 괴로움의 발생 과정을 끊어가는 것을 환멸연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하나의 큰 의문이 떠 오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무명도 있지만 무명를 끊는 힘도 있지 않겠느냐? 들끊어 오르는 욕망의 덩어리, 무명를 보았다는 것은 더 깊게는 그 무명을 끊는 힘도 본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는 대승기신론의 근본적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대승기신론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각(깨닫지 못함; 무명)을 안다는 것은 깨닫기 시작하는 시각이다. 시각이 있게 되면 궁국적 깨달음인 본각이 전제되어야 하고 또 그 본각으로 향하는 것이 된다. 이 말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자체는 욕망의 덩어리인 무명으로 인간을 정의함으로써 일종의 성악설을 견지하고 있는데 대승기신론의 논리로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무명을 타파할 힘으로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성선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 불교와 중국불교의 차별성이 생기게 됩니다. 대승기승론은 주로 중국과 동아시아에서만 논의된 것입니다. 이점을 감안하면 성악설적인 인도불교에서 성선설적인 중국 불교로 전환이 일어난 계기를 대승기신론이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밴마철] [오전 7:28] 단순하게 생각하면 낙천적인 성선설이 좋아 보이고 비관적인 성악설은 나빠 보입니다. 그런데 좀 깊게 생각하면 반드시 이렇게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면 낙천적인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비관적인 사람은 세상을 크게 걱정하며 세밀히 살피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기신론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우리가 서양에 비해 물질적 것에 약하지만 정신적 여유, 정신적 자유 같은 것은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자존감을 유지해 줄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 세세히 자세히 아는 것은 지적 허영심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로는 자기 본 모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낙관론이 결국에 서양의 침탈을 가져오게 했다는 반성도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적 사유가 과학을 가로막는 것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밴마철] [오전 8:03] 요즘 사람들은 권위주의 카리스마 같은 말에 굉장히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볼 것도 있습니다. 막스베버는 이 권위주의가 민주주의와 과학을 가능하게 했다고 합니다. 권위주의는 단순히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제도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내면의 원칙을 포기하고 외부의 절대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법치주의라는 것입니다. 법 자체가 어느정도 카리스마적 권위를 갖느냐가 민주주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도 개인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 원리에 대한 탐구이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성악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중국은 성선설이 기본이 되어 법치주의와 과학의 탐구가 어려워 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권위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면 인간 사회는 어떤 기계처럼 집단화 되게 됩니다. 막스 베버는 이런 것이 물질적 풍요는 가지고 오겠지만 결국은 쇠우리에 갇히는 영혼 없는 전문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쇠우리에서 벗어나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권위주의가 파괴되어야 할 그런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에 시대에 따른 존재의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도 해보고 성악설 성선설을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없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밴마철] [오전 8:41]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근대사에 흥미가 많습니다. 1850년 경에 페리 제독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을 배우자는 열기가 엄청났습니다.  그리하여 1941년에 항공모함을 만들어 서양의 문명의 대표자로 떠 오른 미국을 공격하였습니다. 어떻게 단 기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것이 의문입니다. 사실 진주만을 공격하기 이전 1930년 대 부터 일본이 서양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학술적 측면, 철학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논의한 이노우에 마쓰지로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서양 철학 특히 독일 관념론 같은 것은 대승기신론으로 커버할 수 있고 더 능가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경도학파 사람들은 하이데거를 검토하고 불교의 논리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지적한 서구 문명의 페해를 불교의 논리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양의 수용으로 인하여 물질도 서양과 대등한 수준이 되니 정신은 서양보다 우월하다 그런 인식이 확산 된 것입니다. 이것을 화혼양재라고 합니다. 정신은 일본, 물질은 서양이라는 구도를 심화시키고 이것으로 이차대전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는 일본 nhk 12부 짜리 이차대전 다큐멘터리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 다큐의 주제가 바로 정신은 일본, 물질은 서양이라는 이분법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과도한 낙관론적 생각이 결국 파국을 불러 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버머 전선에서 무라야마 렌야라는 사령관이 일본정신으로 물질적 한계를 이겨 낼 수 있다고 한 것에 신랄한 지판을 합니다. 대승기승론의 연구는 주로 일본이 주도해 왔습니다. 그들이 자부심에 찼을 때인 1930년대에는 한없는 긍정을 보내다가 요즘에서 와서는 이 대승기신론적 사고 때문에 일본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비판적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Jack Shin] [오전 9:40] 별거아닌 것 처럼 보이는 대승기신론이 한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이점 때문일까요?


[밴마철] [오전 10:06] 이것이 일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잘 나가던 시절에 서양 문화를 흡수하면서 서양의 개념어를 전부 한자로 바꾸는 작업도 함께 추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학에 쓰는 대부분의 용어는 이 일본사람들이 만든 것이고 중국도 이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중국의 근대사상은 바로 일본에서 공부하여 수입한 것입니다. 동아시아 전체의 동양철학은 일본사람들이 서양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 유통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중국도 대승기신론에 대한 연구가 엄청 뜨거워졌습니다. 대승기신론의 체계가 화엄을 있게 하였고 그것이 또 선종을 있게 하였고 이런 것이 주자학, 양명학으로 이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 정신의 대표로 대승기신론의 문제가 중요해 지면서 이것이 긍정과 비판도 함께 부각된 것입니다. 대승기신론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중국철학은 자각을 바탕으로 한 위대한 것이다. 불교도 인도불교가 아닌 중국적 불교를 만들어 냈고 그런 것이 중국정신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자각이 결국 학술연구를 게으르게 만들며 사람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도 불교, 엄청나게 복잡하고 현학적입니다. 이런 것이 선종에 와서 불립문자, 깨달음 이런 것으로 요약되어 불교 고유의 현학적 논리는 지적 허영심으로 치부되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철학은 어쩌면 말로 하는 현학적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치밀한 논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요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의 진여수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찬반 논란이 엄청 느꺼웠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밴마철] [오전 10:27] 일본사회를 설명하는 것으로 단까이 세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이차대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전후세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차대전 이전은 전전세대가 됩니다. 이 구별이 중요한 것이 전전세대는 이차대전을 거치면서 정신은 일본 물질은 서양이라는 구분을 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씁니다. 반면에 전후 세대 단까이 세대는 이런 일본정신을 잃어버리고 서구화에 동조되어 물질만능의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합니다. 일본의 극단적 우익이라는 것은 바로 이차대전 이전의 일본정신의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 입니다.


[Jasmine] [오후 3:27] 안선생님의 겸손하시면서 솔직한 학문하시는 태도에 감명받으며 올려주신 글들 잘 읽었습니다.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 사상과 정말 해박하고 깊은 이해를 하고 계시면서도 잘 모르신다니, 대승기신론이 정말 어려운 공부같긴 합니다.
저는 학문적으로 어려운 공부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살아가는데, 제가 행복해지는데 필수적인 앎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식한 소견인지 모르지만, 대승기신론을 학술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하는 덴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각과 본각을 이룬 원효 같은 분이라야 그 세계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대승기신론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고 들었습니다만.
한편,  어제 신샘 지적하신 대로 아공 법공이면 되지 더 복잡할 무엇이 있냐 하신 말씀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저에겐 아공 법공이 어마어마한 경지라서 단순하다 말씀하실 수 있는 기개가 부럽습니다. 에고라는 집착을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일상에서 매일 겪고 있고, 하물며 법집이라는 대상에 대한 집착, 나아가 현상을 이루는 법칙 로고스마져 내려놓는 무애의 경지를 단순하다 말씀하시니 저로서는 놀랍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아공 법공을 떠들며, 저같은 중생에게도 본각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위안삼을 때가 많습니다.  
뇌과학 공부하면서 우리에겐 순수의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순수의식이 본각 같은 것이고 몰입을 통해 도달하는 뇌의 어떤 각성의 기쁨같은 게 시각이란 생각이 들면서 저답게 단순화를 시켜 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번뇌망상(기실 내가 세상에 대해 내가 만들고 내가 부딪히는 온갖 번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단 현실적인 목적과 결합되어 실제적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는 그저 앓음알이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Jasmine] [오후 3:36] 안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안선생님 글을 읽다가 드는 저의 의문점을 말씀드려 봅니다.
일본이 대승기신론을 연구하다가 정신이 서양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세계 정복의 꿈을 꾸었다는 부분; 제가 대승기신론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는데, 아공 법공과 화쟁을 내용으로 하는 대승기신론이 어떻게 패권주의로 흐를 수 있는 건지요? 세계대전은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확장성의 필요가 가져온 결과라 알고 있어서...

저도 살면서 이런저런 세상일을 겪다보니 성악설과 성선설을 단정해서 어느 편이라 말하기 참 어려운데요. 그래서 승속불이나 진여수연 같은 경지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람 안에 제각각 아집 집착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명이 있음과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이나 이타성 같은 게 있다는 덴 동의하고 싶네요. 왕수인의 양지 같은 게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Jasmine] [오후 3:38]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 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
막스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의 동양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 이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이라는 논리입니다.

ㅡ신영복의 <강의> 중


[Jasmine] [오후 3:41] 신영복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배부르고 등따숩게 지낼 수 있는 물질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단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와서야 온고지신의 가치를 되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엉뚱하게도 최첨단 과학자들 일부가 이러한  온고지신을 동양에서 찾아낸다는 점을 발견하고 흥미있게 생각합니다.


[밴마철] [오후 3:41] 예 하여간 최대한 공부방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실제 생활과 연관될 수 있게 설명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제를 시작했고 또 여러분들도 시간을 소비했으니  수박 겉핱기라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는 나가 보려고 합니다. 사실 칸트 순수이성도 어려웠는데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나니 여러 다른 문제 접근하는 데 좀 쉬워진 것이 있지요. 
[밴마철] [오후 3:50]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어느정도 맞는 말씀이지요. 그러데 막스베버가 자본주의 합리화를 마냥 긍정적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가 결국은 인간을 황페화 시킬 것이라고도 한 것이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미국의 근대화론자들은 막스베버의  초기 근대화론에 입각해 한국을 근대화시켜 쏘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침략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박정희의 조국의 근대화는 이런 배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를 위주로 한 포스트모던이즘 학자들은 막스베버의 자본주의 비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랬을 때 강력한 권위주의에 의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결국 인간 삶의 황폐화로 쇠우리에 의한 영혼없는 전문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후 4:04] 일본은 근대화에 들어서면서 불교를 통해 국가의 집단성을 강조하고 또 그것으로 서양과 대결하려는 군국주의로 나간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이 국가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고 헤겔철학이 말한 것을 불교의 화엄의 이사무애로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은 무아로 전체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화엄철학은 대승기신론과 연관을 가진 것입니다. 이돈화의 철학도 이런 점이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요즘 젊은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돈화의 진화론이 헤겔류의 유기체론이냐 아니면 그것과 다른 베그르송의 창조적 진화론이냐 그런 논의가 있습니다.,이것은 대승기신론 끝나고 동학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좀 하겠습니다. 
[밴마철] [오후 4:08] 우리가 이전에 이전에 우찌무라의 두개의 J 라는 글을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우찌무라도 그 당시 국가제일주의 민족제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아가가 사람은 죽이지 말고 그냥 너가 평화롭게 죽어라 그런 논조를 보인 것입니다.


[밴마철] [오후 4:11] 이 우찌무라도 이노우에 마쓰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경도학파와도 밀접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밴마철] [오후 4:18] 우찌무라의 두개의 J 라는 것은 Japan과 Jesus 를 말하지요. 전쟁이 났으니 Japan이라는 민족을 배반할 수도 없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Jejus의 말도 어길 수 없으니 전쟁에서 나가서 평화롭게 죽어라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유기체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제가 이전에 니이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본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하려고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경제개발이 미국의 큰 그림 위에서 작동된 것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차대전 끝나고 미국학자들이 독일가서 막스베버 근대화를 배워서 그것으로 한국을 근대화 하려는 큰 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밴마철] [오후 4:30] 일본의 가미가제 그런 자살공격이 바로 민족을 위해 사꾸라의 꾳잎이 지듯이 장렬하게 산화하자 그런 것이지요. 집단을 위해 개인은 그런 사꾸라의 꽃잎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Jack Shin] [오후 6:05] 저의 본각?은 매우 단순합니다.ㅋㅋ
여러 방편으로 귀동냥을 해본 결과, 우리 뇌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힘들게 사고하도록,일종의 선험적 번뇌의 구조를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겁니다.

생존하기 위해 볼행이 담보되어 있는 거죠. 따라서 번뇌와 고통은 당연한 거고, 행복과 즐거움은 선물이다...
요런 생각속에 절망이 별로 끼어들지 않는 거죠 ㅎㅎㅎ
너무 극단적인 걸까요?


[Jasmine] [오후 6:26] 번뇌=보리!!! 👍 👍 👍 
제가 전에도 느꼈는데 신샘은 아무래도 urban monk같습니다. 
(맥주 좋아하시는 멍크!!(메롱))


[Jack Shin] [오후 10:42] 안선생님의 동서양을 넘나드는 철학과 근대사를 포함한 역사, 종교사,정치사회, 예술 등에 대한 지식과 강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를 들으면서 매우 운이 좋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지금 밴마철 블로그에 강의글을 올리면서 드는 생각이...
강의 내용이 엄청 다양하면서 그 내용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저의 댓글과 질문, 다른 샘들의 글들을 다시 보니 예전에 보았던 기억과 차이가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저의 가벼운 글들이 좀 안스럽게 느껴졌습니다. ㅠㅠ
그러나 태도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습니다.ㅎㅎ

조만간 지난 강의들을 날짜별로 업데이트하는 하는 것을 마치면, 전날까지의 강의가 블로그에 항상 올라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있고 ,살아가는 역사가 이보다 더 생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