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 월. 칸트.푸코.토마스 쿤.에스피테메
[밴마철] 장 선생님 간 선생님 오시니 반갑습니다. 불교 좋아하시니 블로그 불교이야기 계속 할 것입니다. 여기 카톡방에서는 좀 짢고 즉흥적인 위주로 하겠습니다. 지난 번 모임에서 심층종교 표층종교 이야기 할 때 간 선생님이 100% 정답을 애기하셔서 그 내공에 정말 놀랬습니다. 집에 와 인터넷에 확인하니 100% 정답.
칸트 이야기 좀 더 하겠습니다. 요약하면 인간에게는 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틀이 고정불변적인 실체 같은 것으로 있고 또 인간은 자유스럽게 도덕을 행할 수 있는 양심의 틀이 역시 실체처럼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그것들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우선 과학에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칸트는 뉴턴의 만유인력을 인간이 100%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틀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나타나 뉴턴의 이론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뉴턴은 시간과 공간이 어디서나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속도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변형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연에는 100% 맞는 이론이 있다는 것은 깊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나타나면서 자연에는 100%가 아니고 확률적 정확성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 모아서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의 혁명구조라는 책을 썼습니다. 과학에서는 그 틀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그런 변화하는 틀을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은 과학에 고정불변의 틀이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의 법칙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지난 번에 했던 푸코의 진리기준으로 에피스테메. 그 예피스테메도 패러다임 같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불변의 틀이 없고 시대와 장소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근대를 대표하는 칸트 이야기는 이제 잘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100% 옳은 과학의 법칙이나 양심의 법칙은 없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것들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00%는 절대적이란 뜻입니다. 100%가 없다는 것은 상대적이란 뜻이고 그 상대적이란 것은 다원주의의 발판입니다.
토마스 쿤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좀 더 하겠지만 생각나는 것 있어 하나 올립니다. 실천이성은 비판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 듯합니다. 쉽게 말하면 거짓말 하지 말아라는뜻입니다.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상대방에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크게 보면 입장바꿔 놓고 생각하기의 원칙잊니다. 그러면 친구가 적군에게 쫏게 와서 숨겨 주었는데 그 적군이 와서 친구 어디있느냐? 고 물어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마이클 샌덜의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여러각도 살핀 문제입니다. 그것도 상황에 따르는 것이지 어떤 상황에도 100%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0% 보편타당한 양심의 법칙은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는 100%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보았다면 포스트근대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틀렸을지라도 자연에는 100%짜리 진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뜻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확룰적 진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양자역학에서는 그것이 확룰적 주사위 놀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뉴턴 칸트의 100% 짜리 이야기를 근대 기계론적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100%로 딱딱 맞아 떨어저 가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