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 목. 칸트.순수이성비판.해오.증오.철오
[밴마철] 예 좀 천천히 같이 지내다가 보면 세상구경 소풍의 재미도 늘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문제가 큰 철학적 주제가 된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했던 해오 증오 철오의 문제는 모든 종교에 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성경자체를 절대적으로 보는 문자주의는 해오와 비슷한 점이 있다. 깊은 기도를 바탕으로 성경을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것은 증오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죄와 벌에서 이야기하는 것 처럼 성경도 잘 모르고 자기의 해석학적 관점이 없어도 성경이 의도를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은 철오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해오 증오 철오는 세상구경하는 작은 안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문학 공부해서 시험치를 것도 아닙니다. 그냥 스쳐지나는 이름 모를 꽃에 발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드러다보면 경탄하듯이 우리 공부도 그랬으면 합니다. 관심없고 재미 없으면 skip 하고 지나다가 우연히 재미있는 것 걸리면 좀 깊이도 생각해 보는 그런 방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번에 잭 신 선생님이 이런 것 올렸지요.
제가 이 분야의(불교 등) 거의 지식이 너무 없어 다소 이해가 늦을 듯 합니다.
아무튼 안선생님 강의하실 니체의 계보학의 배경을 설명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1)인품 0 연구업적 0
2)인품 × 연구업적 0
3)인품 0 연구업적 ×
4)인품 x 연구업적 x
학자의 견해는 위의 순서일 듯 하고 저같은 일반인이 견해는 1) 3) 2) 4)의 순서가 이닐까요.
1)번인 경우 영웅의 탄생이겠죠.
이것이 칸트의 문제의식인 것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은 과학적 지식의 축척이고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안다는 것과 인성이 훌륭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칸트는 실천이성이 순수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했는데 바로 잭신 선생님이 말한 인성이 업적에 앞선다 그런 뜻입니다.
[Haerim Lee] 잭신선생님이 아니고 제가 올린 건데요.
[밴마철] 잘 못 보았네요. 죄송합니다.
중국불교에서 교종와 선종의 관계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대해서 많이 안다는 것과 실제로 불교적 것을 실천수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론적 지식은 불필요하고 실천수행만이 답이라고 한 것이 선종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자학은 공자 맹자의 말씀이 절대적 기준이 된다고 하면서 격물치지를 강조한 것이지만 양명학은 그런 문자주의가 중요한 것이 자기의 해서과 그에 따른 자기나름의 실천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에서도 성경을 젇대화하는 복음주의는 일종의 문자주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은 자기의 실존적 해석과 그에 따른 자기의 실천.
그러니 해오 증오 철오의 문제에는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이 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푸코의 예술적 삶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좀 요약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최대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 같은 것 하면서 마음에 맞는 소그룹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써서 표현해 보는 것을 꼽고 있는데 우리의 밴마철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자기수행이라는 것은 그 토대에 자기 쾌락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자기 음식 섭생법 자기 고유의 운동법인 양생술이 있어야 하고 자기 표현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 보는 것을 파레시아라고 하는데 이것이 큰 수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sonwj823/221391329736
파레시아(parrhesia) :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가끔 "영혼 없는 멘트"를 날린다고 표현한다. 영혼이 없다는 의미는 진정성의 결여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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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rim Lee] 제가 시험강박의 잔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ㅎ
어느 분야든 용어와 개념에 대한 완전한 이해없이 다음단계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 성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이해하거나 알지못한 채 "아는 척"(이해하는 척) 하기가 싫더라구요.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 자신을 속이기는 힘들기 때문이죠.
(때론 나자신도 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의 병폐도 있지만(특히 한국 교육제도)
시험의 순기능도 분명 있습니다. 안다고 착각하거나 아는 척하는 것을 극명하게 결과가 보여주니까요.
자신 스스로가 만드는,타인 내지
사회에서 받는 가스라이팅이 난무합니다.
특히 경직되고 유연성이 결여된 세팅에서는 더하죠.
비단 부정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개인이 속해있는 'peer group pressure'도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봅니다.
안선생님의 동서양,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비교설명이 매우 좋습니다.
안선생님의 비교설명은 거의 타의추종불허의 경지인 듯.
[Jack Shin] Reply to https://m.blog.naver.com/sonwj823/221391329736
이 사람은 절반 정도 이해하고 글을 쓴 흔적이 역력하네요 ...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는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라는 말 보다,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 됩니다.
자기의 견해를 표현하지 못하고, 옛글을 인용한다든지, 스승의 말만 하고 다닌다 든지, 권위있는 인간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가 맞다고 주장하는 군상들이 세상에 널려있죠.
그럼 네 생각은 뭔데?
물으면 답이 없죠.. 이것도 맞고, 저것도 틀리지 않고...그냥 잡동사니 철학이 되는데.. 한 가지 확실히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면, 스승의 견해가 그 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조사도 죽이고 붓다도 죽이 듯이, 스승 또한 비판할 수 있는 지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Haerim Lee] 100프로는 아니더라도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출발점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견해가 없음은
슬픈 일입니다.
내 견해가 주체가 되어야하고 인용은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주객이 전도되지요.
내용이 좀 빈약하여
절반정도만 알고 글을 쓴 것 같은데...
그럼에도
다 알고있는 척하고 쓴것 같지 않아서 다행인 듯 한데요.
모르면서 다 아는 듯이 쓰는 글을 읽을 때
괴롭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