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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 금. 칸트.실천이성비판.푸코.양명.현각

마철방 2023. 12. 20. 07:11

[밴마철]  우리가 역사를 뒤돌아 보던지 혹은 자기자신을 뒤돌아 보면 한 때 어떤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믿고 따랐던 것이 있습니다. 지금 뒤돌아 보면 그것이 하나의 신기루 허상이었던 것을 알게 되지요. 이렇듯 언어로 된 진리체계인 에피스테메는 시대에 따라 변하며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입니다. 그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구름이 모였다가 흩터지는 것 같은 신기루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용수가 말하는 진제는 공으로 없다는 것입니다,속제는 그 공에 의해 나타난  언어적 진리로 가상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언어가 가상적이라고 해서 우리는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언어적 진리를 절대화하여 그것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위에서 말씀드린 문자주의입니다. 언어로 된 진리체계가 참된 것은 아니라 일종의 가스라이팅의 감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적 진리를 계속 비판하며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적 진리를 절대화하는 것이 문자주의 입니다.불교 선종에서는 언어적 진리체계를 절대화하는 교종 화엄종을 비팜하면 불립문자를 말한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항상 비어있는 공으로 언어로 표현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양명은 모든 성현의 말씀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내 진짜 스승은 내 마음 속의 양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논의들은 언어가 갖는 이중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어는 정보의 전달 소통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진리체계를 꾸며내어 가스라이팅하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양면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잭신 선생님이 지작해듯이 푸코의 파레지아는 이런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지금 현재 나를 가두고 있는 언어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체계로 들어가려는 시도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것이 감옥될 망정 지금 현재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것이 자기수행의 일환으로. 파레시아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은 어떤 언어적 체계를 절대화 한 것입니다. 나중에 이것도 좀 알아 보겠습니다.

 

자주 예로 들었지만 한번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삼 수험생으로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 까지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이 끝나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자면 심한 자책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늦잠자고 놀아도 되냐? 결국 언어로 된 사회문화체계가 그 사람에게 심한 강박증을 심어 준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돈에 의해 이런 강박증이 아주 심한 사회입니다. 돈 안벌고 놀면 안된다는 심한 강박증이 있는 사회입니다. 

 

[Haerim Lee]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은 어떤 언어적 체계를 절대화했다 는 것에 아주 간단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밴마철] 

https://cky8888.tistory.com/2511

 

비록 도둑지릉 했더라도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깁니다. 곧음

(1149회.325논어, 자로18) 섭공이 공자께 말했다. “우리 마을에 궁이라는 강직한 자가 있는데, 그자의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자가 제 아버지의 도둑질을 증언했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cky8888.tistory.com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사람에게 보편타당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편 타당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에 올린 공자의 예화는 칸트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입니다. 보편타당하다는 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도덕의 법칙은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에게도 예외가 없어야 된다는 그런 뜻을 가진 것입니다. 

 

지난번에 칸트의 실천이성은 일종의 입장바꿔 생각하기 황금률의 연장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그럴습니다만 상세히 보면 칸트는 황금률을 감정에 븥잡힌 것으로 비판하면서  자기가 말한 보편타당하도록 행위해라는 황금률을 대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살핀 갓 같이 불교의 자비 흄의 공감 유교의 측은지심은 자기가 현재 보고 있는 사람에게서 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것이 부적하다고 하면서 보지도 못한 사람까지 머리속 이성으로 추론하여 꼭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이 하나의 기계적인 원칙이 되고 맙니다. 

 

https://youtube.com/watch?v=eWV3B1wEkZ0&si=a7LJYix5tSVEk2NF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형식적 윤리와 계율을 파괴하는 하면서 오는 실질적 윤리가 대비되어 있습니다. 칸트의 실천이성은 바로 일종의 계율주의이고 문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윤리는 그 계율을 파괴하는 것에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캉이 칸트를 이같이 비판하면서 칸트를 언어체계에 붙잡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비판합니다. 나중에 좀 더 해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wUwCXm8CZ_o&si=16-YZNDwfv4c9_WX



칸트의 실천이성은 황금률과 비교 연구가 엄청 많습니다. 대략적인 결론은 큰 틀에서 같지만 그 애래에서 이성 중심과 감정중심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이같은 이성중심의 원칙주의는 종교혁명이후 개신교에서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똑 같이 사랑하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똑 같이라는 말이 원칙 계율이 되면 보편타당의 뜻이 됩니다. 이것은 다음에 해 보겠습니다. 

 

오탈자가 많아 죄송합니다, 오탈자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이 강박이 되어 생각이 자연스럽게 풀려 나가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탈자 때문에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부분 질문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Haerim Lee] 제가 대충 읽어서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칸트의 실천이성과 선종의 관계에 대해 잠간 언급하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오늘은 칸트의 실천이성이 문자주의라고 하시네요.

 

제가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백지 수준이라 죄송합니다. ^^

 

[밴마철]  예 잘 지적하셨습니다. 양면성이 있습니다. 지식과 선한 행위의 관계로 보면 지식이 반드시 선한 행위를 끌어내지 멋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 행위가 어떤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 결국은 그 원칙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원칙에 의해 살아 갑니다. 이슬람은 이슬람 원칙 기독교는 기독교 원칙 각기 그 원칙에 의해 그 원칙을 실제로 잘 수행하는 사람과 그 원칙의 배경이 되는 지식과 일정정도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이슬람 자살 폭탄의 소녀들은 그 원칙에 충실했지만 교리를 잘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 여자들이 순결이 더러펴졌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교경전을 많이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순교도 대부분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 태극기부대나 개딸 들 그런 과격한 행동은 많이 배워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 어떤 원칙에 충실하려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장바꿔 생각하기는 많이 배운 것과 큰 상관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입장바꿔 생각하기를 이성에 기반한 원칙주의로 보는 것과 감정에 기반한 연민으로 보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주로 아버지들이 그렇지요. 후자는 어머니들이 그렇지요. 라캉은 이런 것을 아버지체계와 어머니 체계로 대비해 설명하는데 나중에 좀 하겠습니다. 

 

이 선생님은 아주 소풍놀이를 잘 하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 블교나 서양철학이나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이나 다 소통되는 점이 있어야 소풍놀이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Haerim Lee] 격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ㅎㅎ

그럼  현각스님은 지금

독일에 계시나요? 

 

[밴마철]  세계적인 양명학자로 대만에 모종삼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주로는 칸트철학과 양명학의 비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분은 왕양명의 양지는 크게 보면 칸트의 실천이성에 속하지만 그 내부에서 칸트는 이성중심이고 양명학은 도덕감정론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 것은 유명합니다. 

 

예 현각스님은 독일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제 올리신 글 보면 내공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자기 스스로가 만든 타인” 보통 철학에서 이것을 타자 the other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선생님이 이해하신 방식으로 타인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고정관념에 덜 사로잡히면서 자기만의 사유방식 자기만의 소풍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명이 가더라도 소풍에서 구경하는 것은 오직 자기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칙론자는 어떤 측면에서 신념에 투철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른측면에서 보면 감옥에 갖힌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칸트의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이 되게하라는 것은 입장바꿔 생각하기가 절대적 이성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하는데 좀 어려운데 그냥 지상명령 무조건적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독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똑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 지상명령 무조건적 명령이라고들 하지요. 그 비슷한 것입니다. 이유없이 그냥 받들어 입장바꿔 생각하기라는 것이 실천이성입니다. 공부나 배움과 상관없이 그냥 받들어 행하는 것. 

 

오늘은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마늘 밭 거름내면서 짬짬히 하는 것이 제에게는 좋지만 다른 분에게는 피로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Jack Shin] 공자의 정직과 칸트의 정언명령은, 같은 도덕주의자로서 완전히 반대의 신발을 신고 있는 셈이군요. ㅎㅎ

 

[밴마철]  예 잘 보셨습니다. 공자 당시 묵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묵자사상은 기독교 칸트와 매우 흡사한 것입니다, 유교는 도덕의 밑밭침에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원칙에 충실한 것이솔직한 것이냐? 감정에 솔직한 것이 진정한 솔직이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이클 샌덜이 쓴 정의는 무엇인가이라는 책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달의 스승이 그존 롤스인데 롤스는 칸트주의자로 정의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이념적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이클 샌덜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써서 그의 스승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것입니다. 여유가 되면 이런 것도 좀 다루어 보겠습니다. 

 

하나만 더 하자면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은 큰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성의 원칙에 바라보는 것과 감성의 상황에서 보는 것은 좀 다릅니다. 

 

[Haerim Lee] 안선생님 

오늘 볼일 좀 보고 

이따가  천천이 읽어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