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9.24 일.칸트.정언명령.캘빈.아가페.

마철방 2023. 12. 20. 07:26

[밴마철]  아가페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이 아가페를 여러 형태로 논하고 있으나 대표적으로 두개만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1)에서 말하는 아가페와 2)에서 말하는 아가페의 뉘앙스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우리 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치사랑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강조하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의 아가페에 적용시키면 1)은 위로 향하는 치사랑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2)은 아래로 향하는 내리사랑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에서는 기존의 카톨릭이 1)의 치사랑적 아가페에 원래적 아가페가 오염되었다고 하면서 2)의 내리사랑적 아가페만 인정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로 중세 수도원의 수녀들의 글을 분석합니다, 거기에 보면 수녀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들이 많은데 그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연정을 품은 연애편지와 유사한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자 수도자들도 예수를 친구 대하듯 우정의 일환으로 대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나 하나님에게 기어오르는 불경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격이 다른 초월적 존재인데 이 치사랑적 아가폐는 그런 하느님에게 다가가려는 무모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두려운 존재로 인간이 감히 얼굴을 위로 하고 쳐다 볼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그 하느님이 하고자 한 것을 받아드려야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과 같이 위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확보하고 그것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잘 못된 태도라는 것입니다. 2)과 하느님이 내려주신 그 사랑으로 무조건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 시절은 되돌아 보면 아버지들은 엄격했습니다. 감히 아들은 어버지를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뭇했고 귀여운 딸이라도 어버지에게 그런 말을 잘 못꺼냇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그런 말을 해도 되었지만…지금은 귀여운 딸들이 아빠 사랑해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아들조차도 그런 말 합니다, 아버지의 성격이 두려움에서 친근함으로 바꿔 나가고 있습니다. 서양근대는 이것이 거꾸로 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친근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서 엄격하고 무서운 하느님으로 전환이 일어 난 것입니다, 지금도 보면은 카톨릭은 예수님을 친근함으로 보는 것이 많은 반면에 개신교에서 엄격하고 두려운 하느님의 성격을 가진 것이 많습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원래 agape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philia와 구분하지 않고 썼습니다. Philia는 주로 친구 간의 우정을 말합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말하면 Caritas 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잔에서 agape는 caritas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philia라는 연장이라는 뜻잊니다, 지금도 성당에 가면 친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것은 caritas를 의미합니다. 

 

위의 그림 많이들 보셨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입니다. 플라톤은 천상의 이데아를 중시해서 손가락이 하늘을 가르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가락이 아래를 가르키고 있는데 이것은 지상의 구체적 개별자를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eros를 중시했는데 그 뜻은 하늘을 향한 갈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남자 여자가 한 몸으로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분리되면서 서로를 갈망하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나증에는 남녀의 육체적 사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뜻은 하늘에 있는 이데아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에로스입니다. 어거스틴은 주로 플라톤의 철학에 기반해서 하느님을 이해했는데 그 맥락에서 agape를 eros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토마스아퀴나스는 아리스텔레스 철학에 기반하여 agape를 philia로 해석했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에서는 agape를 eros적이거나 philia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롱 신자이어서 성당에도 가 보고 교회에도 갑니다. 가면 성당의 신부님의 말씀과 교회의 목사님 말씀에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느낍니다. 성당에서 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교회에서 하느님이 맡긴 일을 종으로서 다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개신교 특히 캘빈이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는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이 야기는 극단적으로 하느님에게 예쁘게 보이면 떡 하나 더 줄 수 있다는 것인데 하느님이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 판단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절대적 필연적 원칙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상벌을 내리는 것이지 기도와 같은 알량방귀 뀐다고 좋게 보아주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정하고 그 시키는 대로 해야지 힘들다고 알량방귀 뀌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은 토 달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duty라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원칙을 집행하는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의 등장입니다, 칸트의 실천이성을 의무duty론적 윤리라고 하는데 지금 이 개신교들의 주장이 일정정도 반영된 것입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 도록 행하라는 것이 바로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엄격한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의무만 있는 것이지 권리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말이 좀 장황하게 길었습니다. 현대 철학 혹은 정신분석학에서 지금까지 한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주 아버지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요. 그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엄격한 도덕원칙을 뜻하는 것입니다. 좀 더 확대하면 언어로 된 규범체계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징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상징의 핵심이 아버지이고 엄격한 원칙입니다. 

 

요약해 말씀드리면 근대 이전 종교개혁 이전에는 agape는 eros philia 같은 것들과 혼용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eros)으로 네 이웃을 사랑(philia)하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하느님이 내려 준 사랑의 원칙으로 네 이웃을 똑 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똑 같이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보편타당한 원칙이라는 뜻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와 매우 닮아 있는 것입니다. 

 

유교 중용에는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부여한 것이 본성이라는 뜻인데 좀 더 풀이하면 하늘이 인간에게 도덕적 본성을 부여 했으니 그것을 따라 살아라. 그런 뜻이 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명령 같은 뉘앙스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맹자왈 [진기심자, 지기성야。 지기성, 칙지천의)

   맹자가 말했다.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은 성性을 아는 것이다. 성性을 아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진심지천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전형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양명학은 이 진심지천을 중시여깁니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 하늘에 닿아 그 하늘을 안다는 갓입니다, 

 

어제 니그렌이 쓴 에로스와 아가폐라는 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책의 핵심내용은 루터이전의 agape는 플라톤의 eros를 계승한 어거스틴이 아가페에 에로스적 내용을 많이 끌어들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philia를 계승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또 아가페에 필리아 개념을 끌여 들였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 둘을 다 비판했는데 루터 이야기가 원래 기독교적 아가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2002년도 ubc 비짓팅 스칼라로 와서 처음 처 이모가 살던 클로버데일 시골에서 좀 살았습니다. 그 때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났습니다. 저녁이나 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노인들은 대부분 굿모닝 굿 이븐닝이라고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심한 문화적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안해도 되는데 인사를 꼭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다고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고개를 다른쭉으로 돌리고 가면서 굿모닝을 외치며 재빨리 지나쳐 가기도 했습니다. 감정적 교류나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형식적 원칙으로 기계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형태가 칸트의 실천이성의 의무론적 도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싣지 않고 해야할 원칙이기 때문에 하는 형식주의입니다. 

 

[Jack Shin]  좀 궁금해집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신관과 사랑에 대한 변화가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슷해진 것은 실제로 캘빈이 칸트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중세의 숨막히는 신관에서 벗어나 좀 인간적인 신앙으로 가자는 노력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인데 정반대로 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신관과 신앙으로 돌아간 셈이네요.

 

[밴마철]  예 정확히 보셨네요. 갈 수록 사유의 힘이 늘어나시네요. 지금 장선생님 부부가 와서 밭 갈고 있는데 나증에 자세한 설명들이겠습니다. 캘빈의 이야기가 칸트에서 반영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