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 토.칸트.주체.흄.기계론적결정론.푸코
[밴마철] 제리님 반갑습니다. 밴쿠버에서 마늘과 함께 철학애서 JPinVan님에게 우리 밴마철 카톡 방에 들어 오시라고 적극 권하였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Jerry Park in Vancouver의 줄임말이 JPinVan이었네요. 하여간 지금 칸트에 너무 빠져서 블러그에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있는데 조만간 지눌의 공적영지 돈오점수를 하고 또 그것에 대한 성철비판 하겠습니다. 어제 일찍 자느라 이제야 참가 소식을 알게 되었네요. 늙어서 그런지 저녁 잠은 빠르고 아침잠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침 일찍 글을 올리니 좀 죄송하기도 합니다만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나는 것 바로 써야 생각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이 있어서…이렇게 민폐를 끼치게 된 것 양해를 바랍니다.
어제 신선생님과 과학이야기 좀 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중간정리 좀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이른바 근대라는 것은 뉴턴-데까르트-칸트의 모델이 중심이 되었던 결정론적 기계론의 시대입니다. 자연은 100% 필연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흄은 여기에 반대했지만 대세의 흐름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뉴턴-데까르트-칸트 모델이 흔들리고 있고 그에 따라 다시 흄도 각광을 받는 것입니다. 뉴턴 -칸트의 모델은 “하느님이 천지를 주재하시어 밤낮을 있게 하시며 인간들의 행동을 굽어 보면서 착한 이에게 상을 나쁜 놈에개 벌을 내리는 심판을 준비하고 있다”는 종교적 미신을 타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물체는 스스로 운동하고 인간은 그 운동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주 끝에 계시는 하느님이 매일 우주를 돌려 낮이 있게 하고 밤이 있게 한다는 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탈주술화라고 합니다. 주슬적 미신을 탈피했다 그런 뜻임과 동시에 모든 것은 과학의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신 없이 인간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해 낼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근대적 낙관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뉴턴의 만유인력을 제대로 이해했다기 보다 그것이 주는 메세지 모든 것은 스스로 운동한다는 것에 열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차 이차 대전이 터졌습니다. 이것은 러셀이 말한 것처럼 칠면조를 크리스마스 식탁에 올리기 위해 목을 비트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계산적이 되며 기계처럼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정이 파괴되면서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과학이 절대화되면서 그것이 종교적 도그마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탈주술화의 재주술화 라고 합니다. 같이 공부해 오신 븐들은 너무 자주 들어 지겨울 것이지만 새로 오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종교가 헛된 미신으로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시켰다면 이번에는 과학이 신의 위치에 올라가 인간을 계산적인 기계인간으로 가스라이팅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증에 아인쉬타인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과학이 필연적 법칙이 아니고 우연적 확률과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알고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메세지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메세지를 통해 계산적 기계인간에서 좀 탈피해 보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일상생활은 여전히 뉴턴의 모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무시라고 과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또 한번의 칠면조 목 비틀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칸트는 한 300년 전 사람입니다. 종교적 미신을 타파하여 기술문명을 여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점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칸트의 이야기가 그대로 우지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칸트를 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칸트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제목: Introduction to Psychology 3.3: Sensation and Perception- Vision ...
Google에서 검색된 m.youtube.com 이미지
www.google.ca
이 그림을 잘 이해하면 칸트 흄 불교 등을 한번에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외부에 어떤 사믈이 있습니다, 이것이 눈으로 들어와서 뇌를 통과하여 뇌 뒷쪽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래 그림과 연결해 생각해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이 나와 있지 않은데 누르면 그림이 나옵니다.
우리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본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핸드폰이 외부에서 받아 들이는 무엇일까요? 전파입니다. 그것은 진짜로 밖에 있는 재료이지만 눈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핸드폰 기계와 프로그램을 통과해야지 비로소 어떤 이미지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도 이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자극을 이르키는 것은 전파와 비슷한 단지 파장입니다, 귀로 듣는다는 것도 db이라는 일종의 에너지 입니다. 그것이 귀를 통과하여 머리 속에서 소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 길희성 선생님이 동영상에서 이것을 reality and acceptance 라고 했습니다, 실재라고 하는 reality는 thing itself 물자체(독일어로 Ding an sich) 입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외부에 있는 사물자체(물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되어 acceptance 되어 나타나는 appearance(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자체는 알 수 없고 물자체에 의하여 촉발된 현상만 알 수 있다는 뜻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붕어빵 만드는 것으로 비유해 말할 수 있습니다. 물자체는 밀가루 반죽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붕어 빵 틀frame 에 찍여져 붕어빵으로 구워지는 데 그 븡어빵이 appearance 이고 우리는 밀가루는 보지 못하고 단지 븡어 빵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 보십시요. 이것이 이해된다면 순수이성 50% 이해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에네지를 수용하여 그 에네지를 image로 변환시켜 그 이미지 상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블교에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경은 물자체와 비슷하게 외부에 실재하는 그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경은 경이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만든 상 이미지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유식무경을 줄여서 말하면 그냥 유식입니다, 유식이라는 말 참 어려운 말인데 지금과 같이 이래하면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질문은 받고 서로 토론해 보겠습니다.
이래하면—이해하면
칸트철학을 코페르니쿠스 전회라고 합니다. 이 뜻은 칸트이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외부에 있는 것을 안다고 했지만 칸트에 와서는 인간이 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틀frame 로 만든 그 이미지 상을 안다는 것으로 바뀝니다. 그 중심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인간 내부에서 만들어 지는 이미지 상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여기서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 옮긴 것은 오히려 지구에 사는 인간 중심에서 지구 밖의 태양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니 칸트 말과 반대되는 것 아니냐? 그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코페르니쿠스를 인용하여 하고자 한 말은 단지 중심이 바꾸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객관대상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틀로 만든 우리의 이미지 상만 아는 것이다. 완전히 인간중심주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뭔가 잘 못 눌러졌네요. 우리가 우리의 틀로 만든 우리의 이미지 상만 아는 것이다. 에서 말하는 우리가 바로 나를 포함 주체subject 입니다, 칸트를 인간중심주의 혹은 근대주체철학이라고 할 때 그 주체subject가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인간으로서 우리”라는 뜻입니다. Subject 단지 개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인데 가끔은 또 나 라는 개인을 뜻할 때도 있는데 이때도 그 맡에는 인간 우리라는 말이 깔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특히 칸트 헤겔철학에서는…이제 근재적 이성 주체라는 말이 좀 이해되셨으면 합니다.
가끔 또 subject를 주체가 아니고 주관이라고 번역해 쓸 때가 있습니다. 이 때도 그 뜻은 “인간으로서 우리”라는 뜻입니다.
[Jack Shin] 질문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객관대상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틀로 만든 우리의 이미지 상만 아는 것이다. 완전히 인간중심주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인간의 불완전성, 그리고 인식의 한계를 표현한 것 같은데 갑자기 인간 중심주의로 점프한 것으로 들립니다. 객체에 대한 관찰이 인간 내부 관찰로 대상이 바뀌어서 그런가요?
[밴마철] 예 우선 오자 하나 바로 잡겠습니다. 세번째 글에서 칸트 이야기가 그대로 우지되어야 한다는 유지되어야 한다로 써야 합니다.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 있는 데 그것 질문하신 것과 연계하여 좀 보충하겠습니다, 모든 물체는 스스로 운동한다는 것은 결국 우주는 하느님의 힘이 필요없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이 필요없게 됩니다. 중세에는 지구가 중심에 있고 달 해 행성 항성들이 차례로 있으면서 제일 밖에 하느님이 있으면서 하루에 한번 그 하늘을 돌려 밤과 낮이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스스로 움직인다 것에 근거라면 해 달 행성 항성들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하게 되어 하느님의 역활은 필요없는 것입니다(무신론) 있다면 잠자는 하느님 sleeping god 만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과학의 필연적 법칙으로 부정하거나 혹은 하느님이 그냥 필연적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순간만 힘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필연적 법칙이 의해 시계처럼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어 하느님이 더 이상 개입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비판이라는 말이 인간에게 인식의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겸손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실제내용은 인간이 인간의 틀로 만든 이미지 상에 인간이성이 필연적 법칙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법칙이 100%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보는 자연은 모두 인간의 틀로 들어 온 들이고 거기에 필연적 법칙도 인간이성이 부여한다는 뜻이 됩니다, 칸트 이전까지만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하느님이었는데 이제 그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라는 뜻입니다. 좀 과장해 말하면 인간이 신의 영역에 올라섰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출발점이 객관대상을 인간 내부로 이끌어 들인 것입니다. 인식의 한계를 설정하여 인간은 신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그 실제 내용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올라 선 것입니다.
제가 블러그에 메인 글을 쓰고 토론은 카톡방에서 하자는 취지로 배마철 카톡방을 만들고 그 취지를 블러그에 써서 인문학 방에도 공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관심있는 분 카톡방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신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분파를 걱정해서…인문학 방에도 공지했으니 그것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선생님이 인원을 제한하자고 말씀하셨지민 꼭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은 참여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선생님이 같이 하기를 원해서 초대하려고 합니다.
[ 쟈스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선생님. 공부하는 데 게으른 저라서 잘 쫓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눈팅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된 경험을 떠올리면서 가볍게 조인하렵니다.^^
[밴마철] 오신 것 환영합니다. 제 목표는 각자가 각자의 책을 읽는 데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어려운 개념을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개념이 막히면 무슨 뜻인지 책을 읽어도 거기서 뱅뱅도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주체subject도 그런 것이고 reality and acceptance 물자체(thing itself) 와 현상(appearance) 도 그런 것입니다, 오늘 주체 믈자체와 현상만 제대로 이해해도 독서에 큰 힘이 됩니다. 유식무경도 그렇구요.
개념 공부의 중요성에 하나만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길희성 선생님 종교 다원주의 동영상 함께 본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원주의 누구나 다 감으로 대충 알지요. 하지만 그 다원주의가 니이체 데리다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논리도 대층 안다면 다원주의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이런 것이 개념이해의 힘이고 이것이 다른 책이나 동영상이해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가스라이팅 갑질 이런 일상적인 말도 푸코와 연결해 이해하면 더 깊은 소풍이 되는 것입니다. 푸코는 칸트의 주체subject가 바로 심리조작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대 지금 우리가 그것을 구경하려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Jack Shin] 흥미롭군요..
칸트가 인간주체성을 들고 나온 것이 신으로 부터 인간을 독립시켜 스스로 과학을 할 수 있는 주체로 엄청 승격시킨 것인데,,,
이것을 심리조작이라고 우겨댈 만한 세력은 다시 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집단 외에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