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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일. 칸트.순수이성.실천이성.유식무경.탈주술재주술

마철방 2023. 12. 20. 08:41

[밴마철] 예. 선생님 의견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가 가고 있는 소풍길 중간점검해 보겠습니다. 칸트 철학은 신으로 부터 해방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은 과학을 할 수 있는 주체(순수이성) 이면서 자율적으로 도덕을 행할 수 있는 주체(실천이성) 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 뒤집어 보면 과학을 할 수 있는 계산적인 마음을 장착한 인간과 입장바꿔 생각하기를 감정없이 기계적으로 할 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칭하면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는 이런 칸트적 세계가 주류를 이룬 것입니다. 과학지상주의에서 파생한 계산하는 마음(합리성)이 최고임을 믿게 되고 그것이 종교적 도그마화 되었습니다, 탈주술화의 재주술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 창살 없는 감옥인 iron cage에 갖히는 된 것은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모두 돈(합리성의 결과물)으로 치환해서 사는 것이 정당화됨으로서 정으로 이어진 생활세계는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합리성이란 최소의 input으로 최대의 output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산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되고 그렇게 하면 그 결과믈로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을 신으로 모신 결과는 돈을 신으로 모시는 것으로 결론 납니다. 어떻게 보면 중세 하느님의 힘보다 근대 돈의 신이 더 힘이 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이렇지만 외적으로는 감옥과 정신병원이 등장하였습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놈은 또라이로 취급하여 정신병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심한 강박증을 갖게 하는 심리조작을 은밀하게 권력자들이 작동시킨 것 입니다. 사실 감옥보다 정신병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정신병원의 심판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판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벌지 않고 빈등거리면 죄를 짓지 않았지만 심한 죄의식의 강박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중세교회가 하느님 믿지 않으면 죄의식 가지게 되는 것과 유사한 구조입니다. 아울러 이런 것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역사법칙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민족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역사법칙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고 하면서 민족주의 역사법칙 이런 것이 종교적 도그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것이 많이 옅어졌고 그런 것들을 되돌아 보면 그것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감싸였던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저선시대의 정절을 잃으면 은장도 자결하는 것이 진리였던 것처럼. 이제 지금도 자기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각종의 가스라이팅 심리조작이 있지요. 그것을 알아채고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100% 진리를 말하는 칸트적 주체는 해체되는 수순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이 좀 복잡하지만 한번 따라가면서 구경해 보는 것이지요. 독서의 힘도 늘어나고 자기 나름의 비판적 안목도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제 하던 칸트 진도 좀 더 나가 보겠습니다. 아래에 올리는 둥영상은 어제 했던 것 우리 인간은 인간이 가진 틀을 이용하여 인간 내부에 이미지 상을 만든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동영상입니다, 어제 올린 첫번째 그림의 실증적 보층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youtube.com/watch?v=0o17Zwzam1g&si=D5qJuYQY81J-VHWp

 

불교에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할 때 경과 자주쓰이는 상相은 서로 다릅니다. 경은 외부에 실재하는 물자체 비슷한 것입니다, 相은 마음 속에 나타난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 경우 想이라고 해도 통하고 모양 상 像과도 통합니다. 칸트식으로 코페르니쿠스 전회는 불교에서는 이미 일찌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이런 상을 보통 image라고 합니다. 이런 이미지를 떠 올리는 것을 imagin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칸트 철학하는 사람들은 상상력(想像力)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멋대로 생각한다는 의미의 상상과는 좀 다른 뜻입니다. 이것을 구상력 (構想力)이라고 합니다, 상을 어떤 틀로 짜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서 상을 짜 내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표상表象이라고 합니다. 표상은 영어로 representation 이라고 합니다.이representation 은 재현再現이라도 합니다. 다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이 좀 복잡하게 쓰이고 있습니다만 인간은 물자체는 모르고 단지 인간의 틀에 만들어져 현상으로 드러난 이미지 상만을 안다는 것을 이해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인간 내부에서 이미지 상을 만든다는 것을 표상주의 재현주의 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어로 representationism 이라고 하겠지요. 상을 만든다는 것을 점 더 강조하면  constructionism 이고 번역으로는 구성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칸트를 재현주의 구성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말들이 그 원리를 알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원리를 모르면 뭐가 뭔지 당체 감을 못 잡는 것들이 있게 됩니다. 

 

칸트는 객관대상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 경우 그것은 외부 물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만들어진 이미지 상을 뜻합니다, 인간이 가진 공통된 틀 때문에 공통된 상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을 객관 대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불교애서 경은 모르느 것으로 없는 것으로 치브하지만 상은 인정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여기까지 잘 따라 오셔야 합니다. 혹시라토 의문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비랍니다, 

 

이제야 생각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칸트 철학 주체의 강조는 인간이 감정없이 정확하게 일하는 기계가 될 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쾌락도 없는 금욕주의로 정확히 일만 하는 사람. 

 

[ 쟈스민 ] 객관대상이 구조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요? 저는 비슷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밴마철] 이제 그럼 칸트철학에서 증요한 것은 틀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가 관건이 됩니다. 칸트는 이것을 선험적 종합판단先驗的綜合判斷 a priori synthetic judgment이라고 합니다.말이 어마무시합니다. 그래도 천천히 하다보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야 생각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칸트 철학 주체의 강조는 인간이 감정없이 정확하게 일하는 기계가 될 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쾌락도 없는 금욕주의로 정확히 일만 하는 사람. —-이 부분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감정없이 정확하개 일하는 기계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게 바꾸어져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막스베버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인간관과 유사한 것입니다. 

 

[밴마철] Reply to 쟈스민

예 앞으로 칸트의 틀이 어떻게 언어구조로 바뀌어 가게 되는 지를 앞으로 다루게 될 것인데 그 때 자연히 해소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문제는 흄과 밀접히 관련이 있습니다, 흄은 수학과 과학을 엄격하게 분리했슺니다. 수학은 1+1=2이다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 이라는 말은 1+1안에 이미 2가 들어 있다는 것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란 하늘은 파랗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주어 파란 하늘에 이미 파랗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100% 퍼펙트 한 필연적인 것이지만 아무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과학은 다릅니다, 모든 물체가 낙하한다고 했을 때 모든 물체에 낙하한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어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학과 같은 필연성은 가지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수학의 기본 틀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바뀝니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그리고 많은 부분 아인슈타인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선험적 정합판단이라고 하여 과학에 수학과 같은 100% 퍼펙트한 진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 선험적 종합판단을 말합니다. 즉 100%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과학이 있고 그것이 뉴턴역학이라고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연자체인 물자체에는 그런 것이 없을 지라도 인간의 틀 안에 그것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내일 하겠습니다, 

 

하여간 앞에서도 했지만 흄은 인과률을 부정해서 뉴턴의 역학이 100%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과학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뉴턴 역학이 100%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이었습니다, 

 

생존욕구가 절실한 상태에서는 과학적 마인더로 열심히 정확하게 일하는 기계적 인간이 추앙받고 그것을 추구랍니다. 이것이 subject가 갖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배도 부르고 등도 따뜻하면 꼭 그럴게 살아야 하느냐에 반성도 있기 마련입니다. 주체의 해체는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바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Jack Shin] 상세한 일타강의로 인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역시 탈주술의 재주술화가 어김없이 여기서도 발생하고 있군요.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발생한 세력이 또 다른 형태의 독재로 빠지듯이...

 

근현대의 비인간화, 자연파괴 등등의 문제점을 파고들어 가다보니 칸트의 인간주쳬가 자리잡고 있다.

신의 횡포를 막는 사상적 역할은 훌륭했는데 이로 인한 인간의 야만적 폭력성을 잠재우기 위해 인간주체를 해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이해가 되는군요.

 

[밴마철] 예 잘 보셨네요. 예전에 저희가 송두율이 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인문학이란 탈주술의 재주술화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 신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주셨습니다. “애초에 어떻게 보면 중세의 숨막히는 신관에서 벗어나 좀 인간적인 신앙으로 가자는 노력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인데 정반대로 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신관과 신앙으로 돌아간 셈이네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질문으로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런 문제가 나타났다는 것을 제가 좀 말씀드리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근대에 들어 와 히스테리의 급증에 대한 프로이드의 문명과 불만에서 그 단편을 보았습니다. 과학지상주의에 대한 계산하는 마음으로 합리성의 증대는 사실 돈을 신으로 모시는 것에 이른 것입니다. Money is God에서 오는 강박적 압박감은 중세의 신에서 오는 압박감보다 더 크면 컸지 작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은밀하고 정교해서 사람들이 눈치 챌 수 없는  방식의 가스라이팅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 선생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는데 돈은 필요합니다. 함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돈을 신으로 모시는 태도에 비판적 사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과장해 말하면 탈주술화의 재주술화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

 

캘빈이즘의 자본주의 정신은 근면 성실을 바탕으로 과학적 정신 계산하는 마음 합리성을 추구하면 돈이 자동으로 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보면 돈을 많이 벌얼다는 것은 그 삶이 근면 성실 합리성으로 살아 온 것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예정을 확인할 수 있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돈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 결과의 피해는 스스로는 iron cage에 갖히고 사회적으로는 생활세계파괴 자연적으로는 생태계 파괴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