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월.칸트.물자체.초월.언어구조.한글
[밴마철] 지금까지 칸트 따라 오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순수이성 이제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용어들의 복잡성이 있는데 이것은 좀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먼저하면 질려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칸트는 수학과 과학을 매우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학과 과학이 100%의 앎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세에는 하느님에 대한 논의인 신학이 최고의 학문인데 이제 수학과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근대 문명의 핵심도 그 수학과 과학입니다. 수학과 과학이 무엇이냐를 철학적으로 밝히려고 한 것이 순수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왜 개나 고양이는 우리 인간과 똑 같이 보고 등고 남새 맡고 하는 오감을 가지고 감각을 하는데 수학과 과학을 못 할까요? 동물과 사람의 머리 속 구조인 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칸트의 기본 발상입니다. 머리 속 구조가 다르면 사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와 똑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칸트는 이것이 착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수학과 과학이라는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개나 고양이는 그런 틀이 없거나 인간과 다른 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뭘 안다는 것은 수학과 과학의 틀을 통하여 안다는 것입니다, 이 틀은 자주 안경으로 비유됩니다, 인간은 수학과 과학이라는 틀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그런 안경이 없거나 다른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과학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양이는 모든 것을 영화처럼 보지 않고 스틸 컷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안경을 쓰고 있으니 인간들 스스로 그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초월이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했지만 여기서 물자체 thing itself 과 현상appearanc의 구분이 있게 됩니다, 안경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appearance인데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phenomenon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수학과 과학의 틀로써 안경을 통과하여 나타난 것 appearance 만 알 수 있습니다. 안경 넘머에 있는 것은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안경 너머애 있는 것을 물자체 thing itself 라고 하는 것잊니다. 이 물자체는 모든 사물을 있게 하는 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수학과 과학의 안경 잘틀로는 그것이 포착이 안 됩니다. 이렇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두고 왈가왑부 해 보았자 쓸데없는 이야기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이성에서 말하는 신입니다, 나증에 실천이성에서는 신을.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합니다. 수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체계에서는 신을 이끌어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초월이라는 말을 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는 말로 초월이라는 말을 풀어 나갑니다. 눈이 가진 특징은 보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그렇게 보고 있는 작용을 하는 것과 그렇게 보도록 시키는 것은 구븐된다는 것잊니다, 눈 자체 혹은 눈의 구조 눈의 틀은 보는 작용을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본다는 작용과 보게 하도록 시키는 것을 구분한 것입니다. 보는 것은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지만 보게 하는 작용을 산출하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도록 시키는 것은 보는 것과 구분되면서 그 보는 것의 상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칸트는 초월이라고 합니다.
이 눈의 이야기를 생각이라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과 생각을 하도록 시키는 것은 구분되고 생각을 하도록 시키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의 상위에 있습니다. 이것을 칸트는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고 합니다. 오늘 내용 매우 증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를 schema 라고 합니다. 이 스키마는 영어에서 자주 틀frame 이라고도 하고 구조structure 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초월적 스키마 초월적 틀 초월적 구조 초월적 주체 다 같은 뜻을 가진 것이라고 보면 됩나다. 칸트 철학의 핵심은 바로 이 초월적 구조에 있다고 많이 들 말합니다,
왜 인간은 개와 고양이와 다르게 수학과 과학을 하여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인간의 머리 속에 수학과 과학을 할 수 있는 초월적 틀 혹은 초월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schema는 도식圖式이라고 하기도 하고 형식이라 하기도 합니다. 초월적 도식 초월적 형식 초월적 구조 초월적 틀 다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하겠지만 이 칸트의 초월적 구조는 언어구조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훔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칸트의 초월적 구조는 바로 언어구조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구체적인 말을 한다는 것과 말을 하게 하는 구조는 다른 것이지요. 말을 하게 하는 구조는 개별적으로 말을 하는 것을 초월해 있으면서 개별적 말을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구조의 초월적 특징을 좀 생각해 보시라는 뜻으로 동영상 하나 올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한 이야기 중요하니 천천히 음미해 보실 시간도 가지시길….
https://youtube.com/watch?v=hhSDdYqqjpE&si=L1oWxiNIsKd5uXsL
하나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의 기본은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의 구분입니다. 랑그는 초월적으로 있는 언어적 구조입니다, 파롤은 개별적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말을 하게 시키는 것과 구체적으로 말을 하는 것의 구분이 바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입니다. 칸트이해하면 쉽게 이해되지요. 위에서 이미 설명한 것이어서 잠깐 언급합니다,,나증에 자세히 하겠지만…
자꾸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게되네요. 한국어와 한글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라였습니다. 그럼 세종대왕 이전에는 우리는 한극어를 쓰지 않고 중국어를 썼을까요. 한글이 보편화된 것은 일제시대였습니다.)예전 동영상으로 같이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 이러한 혼란은 랑그와 빠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에서 온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이전에도 다 한국어를 썼습니다. 일제시대 이전에도 다 한국어를 썼습니다. 한국어를 썼는데 단지 그 표기법을 세종대왕 이전에도 말은 한극어로 하고 그 표기만 한자로 표기했고 또 일제시대 이전에 조선시대도 말은 한극어로 하고 그 표기법은 대부분 한자로 하였습니다. 이것을 향찰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 이후 조선시대는 가끔 한국어 말을 부분적으로만 한글로 표기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일제시대 이후 점차 표기도 한글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어라는 것은 랑그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의 동영상에 보듯이 우리의 역사와 같이 진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단지 그 파롤에 대한 표기가 한자에서 한글로 바뀐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다 한국어를 말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종이에 쓰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한자를 알아야 쓰가 때문에…그래서 그 말하는 소리를 쉽게 쓰게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한글은 일종의 발음기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 발음기호가 엄청 중요해지는데 그런 이야기가 소쉬르브터 내려오는 언어구조학입니다.
세종대왕이 없었으면 우리 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한글의 위력은 오늘날 와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말은 여전히 한국어로 하고 한자의 음을 빌려서 그 말을 종이에 썼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대부분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컴퓨터나 핸드폰 자판 글자를 일본이나 중국처럼 한자로 올려 놓고 선택해서 쓴다고 하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런 일 없게 만든 것이 한글입니다, 글자에서 뜻은 증요하자 않습니다. 그 소리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소쉬르 이론인데 한글이 이 소쉬르 이론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과 글은 다릅니다. 말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글은 손으로 종이에 쓰는 것입니다.한글은 글자 그대로 글입니다. 말은 이럴게 하고 글은 저렇게 쓰면 불편하지요. 글에는 오묘한 뜻이 있어야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우리가 70년대만 하더라도 신문이 한자 투성이었습니다. 글에는 오묘한 뜻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국가를 國家라고 써야지 글 안에 뜻이 담긴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쓰자고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보니 한자로 國家라고 쓰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이 뜻도 통합니다. 말이라는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대한 약속이라는 것이 소쉬르 이론입니다. 그러니 말에 뜻을 집어넣는 國家라는 표기는 불필요하다는 것잊니다. 국가라고 쓰고 거기에 대한 그 사람들의 약속만 있으면 되니까요. 일본이나 증국은 한국 엄청나게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글같은 글자를 다시 만들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금 한자를 버리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어는 말과 글이 일치합니다.,엄청난 행운입니다,
[Jack Shin] 초월이라는 개념은 메타 라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메타 데이타, 메타 인지 등의 정의가 데이타의 데이타, 생각 위의 생각 등으로 표현되기도 할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선험이라는 것도 초월을 뒤에 둔 스키마 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만 이 구조를 언어학으로 들여 오는 과정이 어렵습니다. 언어가 있고 그 언어의 틀이,각각 파롤과 랑그 인데, 문자와 문법이 랑그이고 사람들의 말이 파롤 인가요?
[밴마철] 예 비슷합니다. 하지만 좀 다른 것도 있습니다. 내일 선험과 초월에 대해 할 예정입니다. 소쉬르는 나중 뒤에서 좀 다루겠습니다. 칸트 끝나고 나서…지금 장민용 선생님 부부가 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