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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목.칸트.Intellect.reason.지성.오성.이성.초월적오성의 구조

마철방 2023. 12. 25. 11:23

[밴마철]  Intellect 라는 단어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intellectus 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단어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네요. the faculty of reasoning and understanding objectively, especially with regard to abstract or academic matters. 이런 정의에서 제 눈에 띄는 단어는 understanding reasoning abstract 입니다. 이것 다 중요한 단어들 입니다. 먼저 understanding 은 철학에서는 보통 오성 이나 지성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흄이 쓴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를 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라고 번역합니다. Intellect를 쉽게 말하면 understanding이고 이것은 오성이나 지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reasoning입니다. 이것은 reason이고 이것은 주로 이성이라고 번역합니다. reason은 원래 라틴어 ratio 에서 온 것으로 추론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로 수학적 논리적 형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원래는 inteelect의 하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철학 특히 데까르트 스피노자등이 논리적 수학적인 방식으로 철학을 하면서부터 이 reason이 오히려 intellect를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성이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오성 지성 이런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일단은 근대 철학에서 들어와서 intellect(understanding)과 reason은 구분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칸트도 이것을 구분합니다. 

 

세번째로 intellect가 갖는 의미로 중요한 것은 abstract추상성입니다, 추상을 다른 말로 하면 개념concept입니다. 지난 번 한번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사과를 보고 사과의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과와 사과가 아난 것을 구분시켜주는 기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과를 사과이게 끔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과의 본질essence라고도 합니다, 이 사과의 본질은 구체적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 안돕니다. 구체적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 이미 그것은 특정 사과가 되어 버리므로 모든 사과를 포괄하는 기준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하여 눈 귀 코 혀 신체라는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감각기관으로 파악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구체성으로 빠져 전체 사과를 포괄하지 못합니다, 전체사과를 포괄한다는 뜻이 보편성입니다. 구체적 사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만 전체사과(보편적 사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보편적 사과(사과 전체를 포괄하는 것) 사과의 본질은 감각기관(안이비설신)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저 세상인 이데아계를 상정하고 거기서 부터 그것이 왔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이비설신이라는 감각기관으로 파악하는 사과는 아데아 계의 사과를 copy한 것으로 다 가짜이다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리스텔레스는 여기에 대한 스승 플라톤을 반대합니다. 아니 눈으로 빨갛고 둥근 것을 보고 있고 그것을 베어 물면서 맛도 보고 남새도 맏고 있는 데 그런 것이 다 가짜라고 하니 …구체적인 다 가짜이고 추상적인 것만 진짜이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하는 이야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 이해해야 흄 칸트 불교뿐만 아니라 소쉬르의 언어학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혹시라도 의문이 있으면 질문주시고요. 

 

지난 번에도 잠깐 언급해지만 an apple과 the apple를 생각해 보시면 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으로 파악하는 것은 물질matter이고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형상form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은 안이비설신을 통하여 들어오지만 형상 혹은 개념은 자연의 빛을 통하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물질과 자연의 빛을 통하여 머리 속 내부에서 오는 형상 혹은 개념이 서로 만났을 때 안다는 것이 성립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모양과 추상적인 개념이 만났을 때 안다는 것이 성립한다는 뜻입니다. 

 

중세 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의 빛(the light of nature)을 God로 바꾸게 됩니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오직 인간에만 이 세계의 창조의 뜻인 본질essence 혹은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의 은총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본질적으로 파악하려고 하고 개념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영혼을 부여했다고 할 때 그 영혼의 내용은 intellect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will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능력은 intellect와 will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라고 말한 칸트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요. 내용없는 사고에서 사고는 개념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즉 추상적입니다, 내용은 감각적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체성입니다. 감각으로 통하여 들어오는 구체성에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빛을 쏘여 주어야 비로소 우리는 무엇을 안다는 것이 성립한다는 것압니다, 개념없는 직관에서 직관은 자연의 빛 같은 것이 쐬여지기 이전에 순전히 감각기관으로만 파악된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념의 빛이 쐬여져야 앎이 생긴다는 뜻입나다. 지난 번 초월에 대해 논의했을 때 했지만 칸트와 아리스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른 점은 바로 자연의 빛이나 신 같은 것이 인간내부의 도식schema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하고 다시 한번 어제 올렸던 그림을 보시지요. 

 

https://images.app.goo.gl/xz8AUEARW2XYdbrW7

 

제목: 김상환, 『왜 칸트인가』(21세기북스, 2019) 1부, 『순수이성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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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체는 모르지만 물자체가 촉발시킨 감각내용을 마음의 틀schema가 자연 빛처럼 그 내용에 어떤 빛을 쏘여 주어야 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보통 형식을 schema로고도 이것을 도식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초월적 오성의 형식 초월적 오성의 도식이 그 감각내용에 개념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다 복잡하면 그냥 어제 해 왔던 대로 초월적 구조 초월적 틀이 무질서하고 맹목적인 감각내용에 빛과 같은 질서를 부여해서 비로소 우리는 앎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를 설명하는 글들에서 이 intellect(understanding)를 어떤 사람은 지성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성이라고 하니 우리는 햇깔립니다. 일본사람들이 주로 오성이라고 하였고 요즘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통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 그것을 지성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일은 오성과 이성은 칸트에개 어떻게 다른가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칸트에서 앎이라는 것은 상상력 혹은 구상력에 의하어 만들어진 진 상( 독일어 Bild 영어 image)에 초월적 오성의 형식 초월적 지성의 형식 초월적 구조가 개념의 빛을 쏘아 주어야  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글 읽다보면 선험적 형식 선험적 오성형삭이라는 말도 많이 나오는 데 그것은 모두 transcendental 에 대한 서로 다른 번역용어라는 것도 알아 두시고요. 

 

우리 말에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똥인 되었든 된장이 되었든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상image를 만듭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개념의 빛입니다. 구분의 기준이 개념입니다. 놔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자체로는 어둠에 쌓여 있어 분간이 안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개념의 빛이 비추어 주어야 비로소 이것은 똥이고 저것은 된장이라는 판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 특히 용수계열의 대승불교는 분별상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이 때 말하는 분별상은 지금 칸트가 말하고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하이데거 역시 상Bild의 해체를 말합니다. 흄은 인간이 확실한 분별상은 갖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통하여 말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가? 어떤 논리로 그런 말을 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앞으로 좀 해 볼 예정입니다. 

 

[Jack Shin]  흄이 우리가 확실한 분별상을 갖지 못한다고 하는 논리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ㅎㅎ

우리는 수학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수단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데, 과학이 100프로 완벽하지 않고 개연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확실한 분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뭐 이런 논리 아닐까요? 

 

[밴마철] 예 비슷합니다. 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종교와 그와 결부된 독단론자입니다. 무조건 확실한 것이 있다고 우기며 따라오라고 하니 흄은 그것을 싫어하다 보니 어떤 확실하다는 것에 굉장한 반감이 있습니다. 이런 반감으로 종교를 비판하고 무신론의 논리에 선봉에 선 것이고 아담 스미스가 흄의 책을 읽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날씨가 좋아 저는 마늘을 심어보고 있는데 한 말이 자꾸 생각나네요. 아점 먹는 쉬는 짬에 생각나는 것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지성인이라고 하면 똥과 된장을 구분하듯히 뭔가를 잘 구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근대는 이런 지성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똥이 가진 개념 된장이 가진 개념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 운동합니다.  똥이나 된장에 대한 생각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증법적 개념운동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이 피와 살이 되어 자기의 삶의 힘으로 나타나여 합니다. 단순히 똥에 대한 개념 된장에 대한 개념만이 많다는 것으로 자기의 삶의 힘은 못 됩니다. 그리하여 개념은 욕망의 힘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있게 되어 오성 지성 이런 것에서 욕망으로서 생의 의지를 포함하는 의식이란 것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헤겔 철학이 대략 이런 것입니다. 앞으로 할 헤겔은 이런 방향입니다. 의식의 현상학으로 넘어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