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 월.칸트.순수이성비판.초월.존재.당위.윤회
[밴마철] 지금까지 한 것으로 순수이성비판은 대략 끝난 것입니다. 그것을 대충 요약해 보겠습니다. 외부대상으로 알 수 없는 물자체가 있어 그것이 감각기관(안이비설산)를 어떤 에너지로 촉발시키는 것이 있어 감각내용이 만들어 지고 그 감각내용이 뇌의 내부에서 이미지 상을 만드는 상상력이 있게 된다. 그 상에 개념의 빛을 부여하는 초월적 오성의 형식( intellect schema)이 있어 그로 인하여 앎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 앎을 나는 생각한다는 식으로 자기의식이 확신을 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것을 경험적 통각이라고 한다. 이 경험적 통각을 하는 나의 의식을 다시 초월하여 관조하는 초월적 통각이 있게 된다. 이 초월적 통각으로 인하여 인과 관계 100%인 과학의 세계가 그 인과관계를 깨트리는 자유의 세계를 모색해 보게 된다. 이것을 이성reas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과학의 세계인 순수이성에서 종교 도덕의 세계인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는 고리를 만들게 된다.
여기서 보면 초월이라는 말이 두번 나옵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는 논리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보는 것과 보게 하는 것이 있어 보는 것은 보게하는 것을 보지 못라지만 그 보게하는 것이 초월적 구조로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대치한 것이 칸트가 말하는 초월입니다. 그리하여 칸트자신뿐만 아니라 칸트를 공부하는 사람은 칸트철학의 핵심이 이 초월에 있다고 합니다. 즉 초월철학 혹은 선험철학이라고 합니다. Transcendental 이 핵심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칸트가 이런 철학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근대이전만 하더라도 자연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가 일치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자연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 자연를 공부하는 것도 일정의 하느님의 섭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과학혁명은 이것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주전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그 우주 밖같에는 하느님이 계셔서 매일 그 하늘을 돌려 밤과 낮을 있게 하면서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피며 주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동설이 나타나면서 이런 논리가 깨지기 시작하고 뉴턴에 와서는 그런 우주의 운동이 물체가 가지는 질량 때문에 저절로 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하느님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근대 과학혁명으로 기독교의 세계관이 파국을 맞게 된 것입니다.
칸트의 철학적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대과학혁명으로 하느님이 부정된다면 그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을 정화시키며 욕망을 통제했던 것도 없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이 부정됨으로해서 생기는 욕망의 무분멸한 폭발을 우려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인장하자니 과학혁명의 결과를 받아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하느님을 부정하자니 욕망의 폭팔이 걱정된 것입니다. 그라하여 그 해결책으로 칸트가 제시한 것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입니다. 순수이성에서 100% 자연과학을 인정하고 실천이성에서는 자유를 말하여 하느님을 인정하여 그,욕망의 폭팔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존재와 당위의 분리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자연 세계에 관해서는 100%의 인과관계를 확립하고 마땅히 해야한다는 도덕 종교의 세계에서 인과관계를 거스리는 자유를 설정하여 자발적 도덕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뉴턴 자신은 하느님을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밤과 낮을 주재하는 하느님이 없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칸트의 자유를 조금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오늘날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혹은 실천이성에서 말하는 이성은 세계평화라는 것에 복무하는 자유입니다. 이것을 공공의 사용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사적 사용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인간이 겪는 불평등의 해소에 그 자유의 사용이 집중된 것입니다. 그러니 강력한 칸트주의자안 스티븐 핑거 같은 논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자유의 확장으로 불평등과. 폭력이 줄어 들고 인류공영의 평화로 가고 있다는 주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이 안다는 것과 선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종교나 도덕은 거창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장바꿔 생각하며 거짓말하지 않는 것만 실천하면 도덕이 실천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대상이 되는 신 같은 것을 거창한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헛된 놀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국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립문자 같은 것이 연상됩니다. 불교를 문자적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헛된 놀음이고 실천을 통하여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수증주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수증주의는 수행해 닦아서 그 불성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양명학도 비슷한 것입니다. 이론적인 격물치지는 불필요하고 자기에게 있는 양지를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양명학자들이 칸트의 살천이성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문자주의를 버리고 영성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큰 틀에서 칸트의 구도와 같은 것입니다, 정한수 한 그릇 떠 놀고 간절히 자기 마음을 정화하고자 하는 어느 무식한 할머니의 깨끗한 마음이 이론의 무장한 종교지도자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심을 드러내 주게 하는 하느님 부처님 성황당을 실천이성에서는 부정할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순수이성에서는 그런 것 다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이제 내일부터는 실천이성비판을 본격적으로 좀 해 보겠습니다. 큰틀은 인과관계와 그 인과관계를 거슬리는 자유입니다.,
비도 오고 하니 예피소드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 몇십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불교 윤회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은 김진 교수라는 사람이 독일에 가서 칸트와 동서 철학을 공부하고 와서 불교의 윤회는 칸트의 실천이성에서 나오는 신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발단이 된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신은 순수이성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칸트는 그때까지 내려온 신의 존재증명은 모두 부정했습니다. 철학적 이론으로 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기관을 통하여 볼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도그마적 독단론dogmatism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이성에서 양심의 근거로 말하는 신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신을 요청presupposition되는 신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요청이라는 말이 참 어려습니다. 실제로는 없는데 선한 행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요청되어 창안되었다는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김진교수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윤회가 그런 식으로 이해되면 불교 논리가 다 무너진다고 난리 난리 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김진교수의 이론에 공감합니다. 윤회를 과학적으로 증명학기 보다는 선한 행위를 위해 요청된 것이라고 봅니다. 윤회를 믿으며 절에 와 간절히 마음 정화 수행을 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그런 것은 미신이니 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윤회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승불교 특히 용수에게는 윤회를. 요청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있고 또 수많은 용수 추종자들도 그렇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1q7Xs9zq5OA&si=OXF2wZfRmgb3wc4X
실체없음이라는 무자성 공으로 나를 설명하면 나는 당연히 무아임으로 해서 윤회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간절함 신실함 그런 각도에서 보면 윤회를 부정할 권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영혼은 실체를 상정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과학에 의존하면 그 종교는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변화하기 때믄입니다. 특정과학이론에 의존하면 그 때는 멋있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과학이론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폐기해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가는 과학이 있는데 낡은 패러다임에 종교교리를 계속 의지하려고 하면 파국이 오는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세신학입니다.,중세신학은 당시의 과학 천동설 운동은 그자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브에서 힘을 가했을 때만 일어난다는 낡은 과학관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지동설 모든 물체는 스스로 움직인다는 뉴턴 역학이 나오자 그 종교도 파국의 국면을 맞이한 것입니다. 칸트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Jack Shin] 인간 전체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초월적 통각을 통한 자유의 개념 도입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 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어서, 다시 신을 요청한다는 논리는 좀 황당하네요. 신이 없다면 인간의 욕망을 자제할 수 없다 는 주장은 근대 초기의 낡은 생각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신이 없는 동아시아의 사회는 욕망이 기득찬 사회가 되어야 하거나, 유교가 신을 대신 하고 있었다 라고 해야 하는거죠.
[밴마철] 뉴턴 역학에서 팁 하나만 하고 가겠습니다. 제일 법칙 관성의 법칙입니다. 모든 물체는 정지하고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하고 움직이지는 계속 움직인다. 핵심은 뒷 구절에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마찰력이 없는 한 계속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운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체자체는 마찰력이 없는 한 스스로 계속 움직인다. 뉴턴 이전 아리스토테레스 그를 계승한 중세 신학은 움직이려면 반드시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주의 운동도 외부의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지구에서는 외부에서 힘을 가해 주어야 움직이지 가만히 있는데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 보면 뉴턴보다 아리스토테레스 말이 더 맞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모든 물체는 스스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지구의 중력이 마찰력이 되어 그것을 정지 상태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찰력으로 정지하여 았는 물체를 다시 움직이려면 또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F=ma이라는 가속도의 법칙입니다 가속도는 시간에 의한 속도의 변화량입니다. 대부분의 물체는 정지해 있기 때문에 초기 속도는 0 입니다. 여기에 힘을 가하면 새로운 속도가 생깁니다. 나중의 속도에서 처음의 속도를 빼서 시간으로 나눈 것이 가속도 입니다. 지구애서 대부분의 운동은 이 가속도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모든 물체는 스스로 운동한다는 것을 오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드려보는 말씀입니다.
뉴턴 역학이 처음 나왔을 때 영국왕립과학협회에서도 그것이 미신이라고 하여 믿지 않았습니다. 외부에 힘이라는 원인이 없이 물체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 흄도 뉴턴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찰력 그리고 가속도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픈닝입니다.
[Jack Shin] 불교가 여느 철학자의 주장과 맞닿아 있어서 비교 고찰이 가능하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견분, 상분,증자분,자증분 등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졸가리와 참 잘맞아 떨어지는군요.
불교는 해탈,견성,윤희 등의 넌센스만 빼면 좋은 가르침으로 생각됩니다만, 잘 나가다가도 위의 주제로만 빠지면 논리와 정신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밴마철] 꼭 신이라기 보다는 신과 관련된 도덕적인 것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교사회에는 신 대신 조상신을 제사 형태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자의 이론대로만 한다면 조상의 혼령은 기운의 일종으로 죽으면 흩어져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지내 마음을 정갈히 하고 가족내의 도덕적 규범을 만들어 가며 욕망을 다스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500년 경에 중국으로 온 마테오리치는 주자의 이론대로 한다면 혼령이 없다고 하는데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은 애들 소꿉놀이 장난이 아니냐는 비판에 조선 성리학자들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합당한 비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답은 혼령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천주교를 믿거나 아니면 칸트 비슷하게 이론적으로는 없다고 하는 것이 맞지만 도덕 실천을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 있습니다.
[쟈스민] 버지니아대 정신의학과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환생 윤회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죠. 인터넷 어디에 보니 칼 세이건도 이런 초자연적 개념들에 대해 엄청 비판하면서도 환생만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다는군요.
저는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 빠진 한 친구는 지금은 비주류이지만, 언젠가 초심리학 초자연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과학에서 주류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더군요.
저는 칸트만으로도 버거운 상태라 암 것도 주장하고 싶지가 않네요. 그래도 요즘 황선생님께 빌려 읽은 몇 권의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쓴 책을 보며, 과학이 무아를 이토록 선명하게 설명하는구나 약간 찌릿했습니다. 죽으면 원자로 흩어져 나무나 돌이 되기도 하고 다른 별로 갈 수도 있는 등 나를 이루고 있던 원자들은 나라는 잠깐동안의 생명현상이 끝난 후 원자의 형태로 모습을 바꿔가며 계속 존재한다... 이것이 윤회구나, 나란 의식작용은 원자가 흩어질 때 사라질 무엇이구나 끄덕여졌습니다.
안선생님 설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몇번 인용하시던 조율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https://youtu.be/3hXNtq1jOvY?si=ffWy5t2x2chBtkIe
[밴마철] 예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라는 것과 연관지어 이 노래를 몇번 올렸던 생각이 납니다. 오래간만에 들으니 역시 좋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가 심했을 때도 신도 수가 늘어난 것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산으로 들어가 숲을 굽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김수환 추기경의 부모도 옹기 구워 판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금 용감한 사람들은 어느 마을에 정착해 살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정갈히 선하게만 살고 천주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10 년 이상 살다보면 이웃사람들이 그들 행동에 스스로 감화되어 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기에 저렇게 선하고 정감있게 사는가에 에 궁금증이 생기게 되면서 그들처럼 살고자 하여 자꾸 캐믈으면 그 때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조금씩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천당은 없다고 하면서 비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교회 새벽기도 열심하 나가면 선한 마음을 갖고자 하는 할머니에게 가서 천당 그런 것은 없다고 하면서 고생스럽개 교회 가느냐? 고 그런 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정한수 한그릇 떠 놓고 비는 할머니, 절에 가서 기도 하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지요. 선불교의 수증주의 요즘 자주 말하는 영성 이런 것도 이런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칸트가 이론적으로 기독교 모든 신의 존재증명을 부정하고서 실천이성에서 신을 인정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고 하이데거도 서양 기독교를 존재 망각의 주범으로 몰아 비판하면서도 인간 존재에 성스러움이 깃들 수 있는 것으로 신을 찾는 것. 사실 니이체도 마찬가지요. 교조화된 신을 부정한 것이지 존재에 생명의 활력을 불러이르킬 수 있는 신은 인정한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했지만 폴 틸리히는 신을 act of being으로 보면서 니이체에 사상적 근원을 둔 것 했었습니다.
[쟈스민] 마치 영적 휴머니즘의 계보를 설명하시는 듯 하네요 ^^
[밴마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종교 지도자들이 진짜로 천당이나 윤회 같은 내세를 믿는다면 세상은 이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부터 온 몸으로 이웃을 도우며 착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도들 앞에 말로만 그렇게 하고 속마음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할머니 같은 순박한 몇 사람들은 진짜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할머니 같은 사람들의 내세관에 대해 부정할 만큼 자신은 없슴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내새관은 부정하고 싶은 맘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