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 목.칸트.자유.실천이성.물자체.도덕율
[밴마철] 이제 다시 칸트의 실천이성으로 본격적으로 돌아 가려고 합니다. 그 핵심은 자유自由입니다. 저는 한문을 옹호하거나 한글전용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언어는 음가 소리가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를 한자로 써서 梨花女子專門學校라고 해야 그 언어가 가진 뜻을 가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자고 해서 “배꽃계집오로지배움터” 이것 또한 말에서 뜻을 찾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기 위에 올린 동영상 스트븐 핑거의 언어와 사고에서도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 순수프랑스어를 개발하고 지키자는 말은 언어학자가 보기에는 웃기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개념적 명사는 80% 이상이 일본사람들이 서양 개념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앎을 구성합니다. 이 뜻은 우리의 사고체계가 이미 서양식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동양철학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용어는 거의 다 서양철학에 기본을 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유(自由)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서양의 freedom을 일본사람들이 근대에 들어와서 자유(自由)라는 것을 스스로 自라는 한자와 말미암다는 由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가 민족 이성 감성….등의 거의 모두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한자로 써야 그 뜻을 제대로 드러낸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자로 쓰지 않고 소리 값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좀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글자자체에서 뜻을 찾지말자는 것이 제 지론인데 이 지론과 다르게 한자로 쓴 自由라는 글자는 저를 놀라게 합니다, 한글로 풀이하면 스스로 말미암다는 뜻입니다, 이 뜻만 알면 실천이성 50%는 먹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자유의 뜻을 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自由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를 써서 스스로 말미암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자기자신에게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면 자기자신에게 그 시초의 원인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원인성이라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궁극적 시작점으로 원인성은 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면 그 원인성이 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自由라고 하면 스스로 원인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신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칸트가 자유는 본체계에 속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인간이 신의 위치에 와 있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뜻은 어떤 뜻을 가진는지를 좀 살펴 보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혹은 네가 대접 받고 싶으면 입장바꿔 다른 사람에게게도 그렇게 대접하라(golden rule) 라는 것들은 신의 명령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신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논리입니다. 원인이 신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보통 타율도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더 살펴 볼 것이지만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되도록 행위하라“ 라는 것은 그 원인성이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율도덕이라고 합니다. 자유自由는 자기자신에게 원인성이 있다는 뜻으로 자율도덕으로 간다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계명형태로 되어 있는 윤리적 명령을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으로 바꾼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네가 대접받고 싶으면 입장바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접하라는 것과 네 의지의 준칙이 입장바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법은 결과작으로는 비슷한 것입니다. 입장바꿔 생각하라는 것에 기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골든 룰은 신의 계명이고 칸트의 정언명법은 인간자신의 자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미암다는 自由는 두번째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순수이성에서 물자체thing itself를 말하였습니다. 그 때 물자체는 그 물자체를 우리가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에네지로 감각기관(안이비설신)를 자극하여 감각내용을 만들고 그 감각내용에 오성의 형식이 개념의 빛을 비추어 줄 때 비로소 앎이라는 것이 생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앎의 궁극적 원인성은 물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물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 원인성은 물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自由 스스로 말미암아 그 원인성이 자기자신에게 있다고 하면 우리자체가 바로 물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순수이성에서는 경험되는 지식을 다루는 과학의 세계로 그것을 우리가 따라야 하지만 실천이성에 와서는 우리 스스로가 물자체가 되어 우리가 명령을 하고 우리가 그것을 따른다는 뜻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순수이성에서 인과관계 100%인 자연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실천이성은 어떤 법칙을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앞에서 우리는 존재와 당위의 구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이성이지만 그것이 쓰이는 방식에서 100%의 인과률의 과학의 세계를 다루는 순수이성과 도덕 종교에서 다루는 자유에 기반한 실천이성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 특히 대승불교를 자율종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칸트를 잘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소승은 12연기에서 인과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유전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순수이성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인과관계를 끊을 수 있다고 하여 해탈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은 칸트의 실천이성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자유와 비슷한 것입니다. 또 하나 살펴보면 소승은 부처님 말씀을 법칙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대승은 부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혹은 모든 말씀은 속제이고 이 속제와 구분되는 진제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법공法空입니다. 법공이 가지는 궁극적 의미는 모든 수행은 자기자신에게로 부터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수행의 원인은 자기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극단화가 선블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더 하겠지만 칸트와 불교는 다른 점도 많습니다. 그 자유의 공공적 사용과 그 자유의 개인적 사적 사용에 그 차이가 있습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자유가 주로 공공적인 것으로 사용되다가 2차대전 이후 실존철학에서는 자유의 공공적 사용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자유의 사적 사용을 강조하게 돕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대승불교와 비슷한 점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도 중요한 것 하나 했습니다. 자유는 스스로의 자기 원인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한 말 중에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 즉 자기원인성을 가지는 신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신을 대우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그렇게 대우하라는 뜻입나다.
얼마 전에 배미경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겼지요. …문을 열고 나가면 길이 있어요. 보행이든 운전이든 길따라 걷게 되어있고 어떤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규칙을 무시하면 사고로 이어지므로 몸에 밴 많은 규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안전 규칙에 갇혀 길을 가게 되죠. 사막엔 아무 것도 없죠. 길도 신호등도 운전규칙도... 모든 게 열려있는 거죠. 발을 내딛는 순간 순간이 나의 결정을 필요로 하죠
언제부턴가 저는 무나 공이 열려있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너무 단순하고 뻔한 답을 드려 죄송~~
여기서 규칙을 따르면서 가는 자유가 바로 칸트가 말한 공공의 자유와 비슷합니다. 사막에서 자유는 사적 자유의 사용과 비슷함니다. 이 이야기 앞으로 더 하게 될 것입니다.
비가 잠깐 갠 틈에 마늘 심다가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칸트는 실천이성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로 그의 묘지명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순수이성에서는 자연법칙의 궁극적 원인으로 물자체이고, 내 안에서 빛나는 별은 도덕률의 원천으로 자유의 원인성으로 물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자체의 두가지 의미를 안다면 칸트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셈입니다.
위에서 나오는 묘지명의 내용을 간단히 하여 하늘의 별과 내 마음 속의 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