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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일.칸트.물자체.현상.하이데거.존재.존재자.헤겔.키에르케고르

마철방 2023. 12. 28. 08:44

[밴마철]  물자체에 좀 더 논의해 보겠습니다. 좀 어려울 수 있으니 패스하실 분은 패스해도 좋습니다. 진도와 큰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여기 눈 앞에 작은 돌맹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우리가 그 돌맹이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까요? 우리는 그 돌맹이를 완전히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다 알 수 없다고 한 것 입니다, 그것의 일부분만 알 수 있다는 것에서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한 것입니다. 물자체 thing itself 를 실재reality라고도 합니다. 그것에 의해 드러난 현상phenomen를 드러남appearance 라고도 합니다. 그 돌맹이의 모든 것은 모르고 그 돌맹이가 드러내고 있는 일부분만 안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런 칸트를 변증법을 이용해 강력히 반대합니다. 우리의 지식이 현재 그 돌맹이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지식이 계속 발전하면 그 돌맹이의 물자체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석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이 원자로 이루졌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이 미립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결국 돌맹이에 다 안다는 것은 우주전체를 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변증법이라는 것이 이런 특징을 가집니다. 돌맹이는 모래로 이루어 졌다. 아니다 석영으로 이루어 졌다. 아니다 원자로 이루어졌다….식으로 지식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세계인 절대장신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물자체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칸트가 말한 물자체와 현상의 구분은 물자체와 현상의 구분은 엄격하고 그런만큼 그둘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를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구분이 엄격하지 않은 하나에 대한 양측면일 수 있고 그러면에서 그 둘이 같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야기는 그의 전체철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이데거 공부하면서 매우 어려워했던 존재Being과 존재자beings의 바로 칸트와 물자체와 현상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있게 하는 것은 물자체가 현상을 있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분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어떤 경이감을 통해 존재가 존재자를 뜷고 드러나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호의 구두입니다. 이점은 물자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 헤겔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새로 오신 분도 있고 하니 고호의 구두 다시 한번 올리겠습니다. 

 

https://brunch.co.kr/@topgunkk/131

 

빈센트 반고흐, 끈 달린 낡은 구두 그리고 하이데거

초보의 반고흐 모작 그리기 | 빈센트 반고흐의 '끈 달린 낡은 구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미술부에 놀러 가면 항상 누군가는 낡은 워커(군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둡고 칙

brunch.co.kr

 

이 고호의 구두는 존재와 존재자가 구분되지만 그 존재자를 통해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래에 그 설명이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114212

 

[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하이데거 - '고흐의 구두는 세계를 담고 있다' | 중앙일보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항상 인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돼야 한다고 보았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는 여러 차례에 걸

www.joongang.co.kr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을 이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의 구분을 머리 속에 염두하고 있으면 그 이해가 한결 수월해 집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야기하면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속에서 영원” 이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에 반대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물자체와 같은 절대정신 신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너무 오만 방자한 것으로 선을 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신 물자체는  영원한 무한입니다. 그에 비하여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결국은 죽어 사라져야 할 유한자라는 것입니다. 무한자와 유한자는 구분됩니다. 그러나 그 유한자가 무한자에게 단독으로 정면으로 마주 했을 때 유한자가 그 무한자의 일부분을 맞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실존적인 간절한 순간에 그 영원한 무한자의 일부분을 캐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영애 교수 동영상으로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간 속에서 영원”은 요즘 저의 삶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 존재와 존재자의 논리는 이 키에르케고르의 순간 속에서 영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순수이성에서 나오는 자연의 근원적 원인성에 대해 논의한 물자체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근원성으로 물자체는 내일 논의하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자유는 어쩌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알수 없는 욕망이 우리를 움지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쇼펜하우어를 거쳐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일….

 

자연의 근원적 원인성을 칸트는 물자체라고 하고 그것이 과학의 법칙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자연의 근원적 원인성을 무와 함께하는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 특히 시에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자연의 근원적 원인성을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원인성을 과학에만 맞추다보니 어느 덧 과학이 우리 삶의 전체가 되어 버려 그 과학하는 마음인 계산하는 마음이 우리 삶의 전체를 재단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는 황폐해 지고 신들은 떠나가고 사람들은 개성을 잃은 평균적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간연남 선생님이 지인들과 마늘 심으러 온다고 하여 준비하고 있는데 잠깐 짬이 나서 생각나는 것 하나 더 하겠습니다. 자연이란 무엇일까요.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면서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알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것이 우리에게 순간 순간 수 많은 의미를 파생시킵니다. 그 의미를 파생시키는 것이 존재입니다. 그 의미가 파생되어져 분명하게 드러난 것 apperance가 존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의 세계는 과학도 있고 예술도 있습니다.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할 때 자기 맘대로 지저귀는 새, 잡초 속에 피어있는 고귀한 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저 새는 무슨 새이고 저 꽃은 무슨 꽃이라고 판단하며 과학적인 의미의 세계를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솟아오르는 생의 기쁨 꽃에서는 역경을 이겨낸 고귀함을 보면서 예술적 의미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근대라는 것이 과학적 의미의 세계만 100%라고 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존재는 의미의 세계를 파생시키는 원인성, 존재자는 그 의미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구분된다면 존재자에서 존재가 바로 드러나는 것은 어렵지요. 보통은 그 존재는 감추어져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이감 속에서 존재자에게서서 그 존재의 면모가 바로 드러나는 탈은폐(알레테이아aletheia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호의 구두처럼 혹은 순간 속에서 영원의 포착처럼. 

 

세계 혹은 자연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 많은 의미의 세계를 파생시키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 이해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