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 월.하이데거.존재.탈은폐.근대.계몽
[밴마철] 우리의 주변에 돌도 있고 꽃도 있고 흙도 있고 …여러가지 사믈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냥 있는 것들은 존재자beings입니다. 나라는 것도 그런 존재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 꽃이 나라는 존재자에게 말을 걸어오듯이 어떤 몸짓을 보내옵니다. 그 몸짓에 말(언어)로 대답하면서 하나의 의미의 세계가 열립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것을 존재진리사건이라고 합니다. 꽃이 빛의 밝음으로 나를 열리게 촉발시키고 그 밝음에 의해 나는 나를 열고 그 밝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존재자에 불과했던 꽃이 어느 순간 존재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되어 존재자인 내가 그 존재를 받아들여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꽃이라고 불러줄 때 존재자인 나에게서도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간에서 영원 이런 것이 연상됩니다, 존재가 한번 드러났다고 하여(한번 탈은폐했다고 하여)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상황으로 가면 곧 또 그 모습을 감추는 은폐로 가는 것입니다. 은폐와 탈은폐가 반복되면서 의미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밝히면서 건너옴‘으로 스스로를 내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꽃이 보내는 몸짓일 것입니다. 그 몸짓에 대답하며 꽃이라고 불러 줄 때 의미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짓는다고 할 때 어떤 시상이 순간적으로 번개치듯이 번쩍 떠 오르는 것을 연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꼭 시를 짓는 것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뭔가 번쩍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광석화 같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에서 전광은 번갯블이 번쩍하는 것이고 석화는 두개의 돌이 마추칠 때 일어나는 불꽃을 말합니다. 소식消息은 숨을 쉴 때 찰나적으로 생겼나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전광석화 같은 소식은 순간적으로 얻어진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순간에서 영원이라는 것과 뜻이 통하고 하이데거의 존재진리사건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런 측면에서 불교의 돈오돈수보다 돈오점수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돈오돈수는 한번 얻은 것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고 돈오점수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천포로 많이 빠졌습니다만 여기서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의미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는 각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의 의미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오는 가장 중요한 논점입니다. 근대는 인간에게 하나의 세계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 하나의 세계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몽(enlightenment)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도록 살아라” 라고 충고를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바로 꼰대짓 그만하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 올 것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의미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지도하며 이끌어 가겠다는 계몽은 이제 꼰대짓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계몽이라는 것은 신으로 부터 해방되어 인간 모두가 함께 나갈 길이 있다고 하면서 그 길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에게 깨우친다는 뜻이 입니다. 이것을 근대계몽주의 철학이라고 하고 칸트 헤겔이 그 정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자기 중심적 의미체계에 와서는 그런 것이 꼰대철학으로 전락한 측면이 있습니다.
칸트 헤겔철학을 근대 계몽의 기획이라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하나의 중심이 있는 커다란 우산 밑에 모두 모여 비를 피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양한 의미의 세계라는 것은 각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의 우산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근대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 통하는 것이였다면 탈근대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것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https://images.app.goo.gl/HU1FG3xEY1CQnZSm6
제목: 다양한 우산이 색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건조, 꽃들, 꽃무늬 ...
Google에서 검색된 kor.pngtree.com 이미지
www.google.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