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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일.칸트.하이데거.무화.존재.현성.쇼생크탈출

마철방 2023. 12. 28. 10:46

[밴마철]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는 각각 자연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칸트는 자연을 과학법칙의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이 뜻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이러저리 맘대로 쪼물딱 거려서 인간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자연를 우리에게 살아감의 의미(존재)를 부여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자연에는 고호의 구두 피가로의 결혼에서 편지의 이중창처럼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이 인간에 의해 맘대로 쪼믈딱 거려져서 황폐화되면 그만큼의 삶의 의미도 약화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두 견해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스스로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지에 생각해 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무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1) 무無는 무화無化한다.

2) 무는 존재를 현성한다. 

 

이렇게 써 놓으니 굉장히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앞에서 다 설명드린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의미를 분명히 해 보겠습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한 존재물음 즉 “도대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 이 말을 나에개 적용시키면 “왜 내가 있는 것인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러한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평상시 일상생활을 할 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이 두렵고 불편해서 피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술자리 같은 것을 벌려서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면서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술자리가 파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 올 때 혹은 새벽녁에 술에 깨어 혼자 있게 되면 어제 가졌던 술자리가 다 쓸데없는 헛짓거리라는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왜 내가 사는 것인가? “ 이런 질문이 스스로에게 떠 오릅니다. 이 때 사람들 사이에서 헛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화입니다. 이 무화를 통해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하며 살아있음의 의미를 자문자답해 보는 것이 존재의 현성입니다. 현성이라는 것은 드러나며 성립한다는 뜻입니다. 무는 존재를 현성한다는 뜻이 바로 어제 했던 무와 존재가 공속한다는 뜻입니다. 무와 존재가 상호보완적이며 서로의 꼬리를 문다는 뜻입니다. 

 

[hwangjisook] 무는 무화한다

무는 존재를 현성한다.

 

[밴마철] 예 하이데거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나는 하나의 존재자로 일상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 일상에 빠져 있을 때는 살아가면서도 살아있음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파묻혀 술자리 가지며 웃고 떠들며 그들과 함께 하는 평균적 존재자 중의 하나로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본래적 삶이라고 합니다. 새벽에 술에 깨어 이런 평균적 비본래적 삶에서 곁으로 빠져 나와 문득 섬뜩하게 다가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의 내면 깊숙히 심연으로 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가 있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양심의 소리라고 합니다, 이 양심의 소리에 의해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있게 되는데 이것을 무가 존재를 현성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것을 헛짓지거리로 돌리고(무화시키고) 삶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는 것을 무가 존재로 현성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사는 한갖 존재자로만 사는 비본래적인 삶과 존재를 의식하고 사는 본래적인 삶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자와 존재의 구분입니다. 

 

이미 헤겔의 변증법에서 삶 속에는 죽음이 모순으로 자라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유리잔과 두 사람의 얼굴처럼 삶의 배경으로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서 삶이 명확히 부각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무를 통해서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는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안을 통해서 자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음이 없다면 삶 역시 흐리멍텅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브룩스가 써 놓은 글 “브룩스 여기 있었다.” 는 역설적으로 얼마나 삶을 갈구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블안을 감내해 내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레드도 여기 레드가 있었다고 써 놓고 그 불안을 이겨내고 자유를 찾아가는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의 평형상태를 깨고 다른 상태로 진입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죽음은 무입니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삶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무를 말하는 것도 유가 자유로운 상태로 있어야 명확히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사실 모든 것이 끝이지요. 그런데 그런 죽음을 미리 가져 와 생각해 본다는 것은 삶을 더 명확히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