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금.칸트.정언명법.공적자유.사적자유.토마스아퀴나스.정약용.헤겔
[밴마철]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적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고 발전하면 그에 따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매뉴얼들이 증가합니다. 매뉴얼의 증가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며 사람들을 매뉴얼 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사적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 사적 자유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불교 그 중에서 대승불교가 눈에 띠이게 되는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욕심을 억누르고 산다는 금욕을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도대체 왜 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참고 살아야 하는가? 니이체의 가장 큰 문제 의식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 많이 하지요. 죽으면 다 끝인데 뭐 하려고 고생만 하고 산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을 가져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자유라는 뜻이 성립합니다. 자유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또 그에 따른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오직 인간에게만 그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지성intellect와 지성으로 파악된 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will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법칙을 따라 살 것인가? 따르지 않고 살 것인가? 를 선택하여 결정하는 의지가 있는데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고 하느님의 법칙을 따라 살면 천당이 보증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하느님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당연히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자기 맘대로 한다는 뜻(사적 자유)이 아니고 결국은 하느님의 법칙에 따랐을 때(공적 자유)만 진정한 자유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좀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하여 충격을 받은 사람이 다산 정약용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논리는 마테오리치를 통하여 중국에 소개되어 정약용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유교에서는 보통 사적 자유에 해당하는 것을 인심이라고 공적 자유에 해당하는 것을 도심이라고 하고 이런 논의를 모두 합하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라고 합니다. 조선 성리학 퇴계 이황 율곡 이이가 다루었던 문제는 바로 이런 인심도심설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도심으로써 인심을 통제하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 이렇게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준칙으로 도심에 의하여 자기가 맘대로 하고 싶은 인심을 억누루자는 것입나다, 여기서 참고 살자는 금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참고 산다면 무슨 보상이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성리학의 대답은 안심安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심간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다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의 논리를 보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강력한 보상체계가 없이 단지 마음의 편한함만 있다고 하면 과연 어느 누구가 강력하게 도심으로 인심을 억누르겠는가?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보상체계가 없으니 말로만 도심으로 인심을 억누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도심이 아닌 인심에 마음을 편하게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보상체계라는 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법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도록 하라” 이것이 나오게 되는 것은 지유에서 시작했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게 대하라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뜻에서 칸트의 윤리론을 의무론적 윤리관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좀 쉽게 말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원칙에 입각하여 살아라 그런 뜻이 됩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참고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그런 원칙에 입각하여 살아라 그런 뜻으로 강력한 금욕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만약에 그렇게 참고 산다면 어떤 보상이 있는가? 어떤 보상이 없다면 누가 그렇게 참고 살겠는가? 그런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그는 영혼불멸과 신을 요청합니다. 순수이성에서는 영혼불멸이나 신은 우리가 감각 내용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거나 부정되지만, 여기 실천이성에서는 그 보상체계로 그 신과 영혼불멸이 요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청이라는 말이 매우 애매하고 어렵습니다. 실제로는 없는데 불구하고 어린아이에게 계속 울면 호랑이가 물어 간다. 혹은 착한 일 하면 산타가 와서 선물 준다는 식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식의 이야기인지 논의가 분분합니다. 어찌되었든 자발적 도덕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보상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논리는 공부를 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좀 비약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겠지만 그래도 우선 좀 해 보겠습니다. 우리 말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헤겔철학을 잘 드러내 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 이상 세계로서 천당 같은 것이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원리로 대로 하면 그것을 이승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정신이라는 필연적 원리가 제대로 구현되게 살면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천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이런 이야기는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여 좌파는 공산주의가 되고 우파는 민족주의가 됩니다. 좌파 공산주의는 결국 역사법칙을 따라 살면 지금은 어렵지만 나증에는 궁극적으로 천당 같은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보상체계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바뀌었지만 그 보상은 나중에 온다는 것에서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우파도 민족끼라 뭉쳐 세계정신을 이끌 수 있게되면 그것이 다른 민족으로 받았던 모든 압제로 벗어난 지상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여기에도 그 보상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니이체 이야기는 나중에 보상해 준다는 이런 논리에 의해 사람들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것은 희망고문으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가? 이런 것이 사기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내일 좀 더 하겠습니다.
[Jack Shin] 불교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사적 자유에만 사상적 기반을 둔 불가의 깨달음이, 각을 이루고 나면 공적 자유도 자연히 깨달을 거라는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적자유와 사적자유는 하나 이다.ㅎㅎㅎ
이런 논리를 펴겠죠.
사실 불교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기 힘든 것이 이런 점에 있다고 봅니다.
저의 결론은 공적자유에 대해 치열한 고민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적자유는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허무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같은 부작용만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사실 사적자유는 공적자유를 담보로 주어지지요.
누군가 전체를 위해 질서를 만들어 내고, 안전을 위해 힘을 쓰고 있고, 정의로운 기반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개인들은 보이지 않는 공적자유를 잊고 삽니다.
전쟁이나 대형사고가 터지고 비로소 우리는 공공이 이루어내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일게 됩니다. 종교야 말로 공적자유가 충분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인데,오히려 그들은 지들의 신앙 때문에 평화가 이루어 지고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고로 성철이 육이오 동란때, 용맹정진한다고 산사에서 힘을 많이 쓰고 있을 때, 북한 군이 찾아 왔드랩니다. 호기있게 총을 든 군인들에게 대들었죠. 중이 전쟁과 무슨 상관이냐? 옆에 있던 청파가 사정하고 잘 달래서 군인을 보내지 않았으면, 후세에 이름을 남길 기회가 없었을겁니다.
공적자유를 뛰어넘는 불자의 사적자유는 무모함인지, 존경스러움인지 모르겠습니다.
[쟈스민] 자유란 말처럼 혼란스럽고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도 없을 거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유가 인간에게 그만큼 중요하단 것이겠죠.
헤겔에 대한 안선생님의 간략한 언급에서 저는 좀 재밌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류의 선각자라 할 수 있는 성인들의 공통점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추구했단 점이고 그것이 성공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 인간역사인 거 같습니다. 그리하여 공적 자유와 사적 자유의 균형점을 기준으로 볼 때 공적에서 사적으로 중심점이 이동해 왔다는 점이 보이는 거 같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서 실현해 보고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갈구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해 유물론적 사관을 정립하고 평등세상을 꿈꾼 맑시즘 역시 실패한 경험을 남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약간 예외적으로 보이는 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공적 영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사적 영역의 중도를(금욕주의와 쾌락주의도 아닌) 제시한 것이고 이것이 사적 자유가 공적 자유의 복잡하고 교묘한 구속체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모스트 모던에 와서 재조명받는 거 같은 그런 큰그림이 저에겐 다가옵니다.
저는 사적 자유가 탐진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진 않습니다.탐진치에 의존한 인간의 욕망은 결코 만족이 없으며 또다른 속박이 되어 탐진치의 노예화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밀쳐내지도 않고 가는 길이 중도일 거라 생각은 드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탐진치를 정화하려는 시도는 내세의 복락이나 마음편함 같은 보상체계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 연결된 인드라망의 구슬이고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지요. 니체의 위버멘쉬도 외적, 내적 자유인의 전형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재밌는 건 이제 우리는 나중에 오는 보상체제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속임수임을 눈치채 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가 끝없이 강조되고 작은 행복이라고 지금여기서 챙기며 살자는 소확행 같은 것도 그런 거라고 여겨집니다.
과학에서조차 자유와 필연의 대립과 갈등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은총이 중력의 은총안에서 사는 걸 말하는지 중력을 넘어서는 걸 말하는지 헷갈리는 겁니다.
리플 투 밴마철 [쟈스민]
이 논의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뻔한 말로 끼어들기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