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일.헤겔.이성.공존.주인과노예의변증법.정신현상학
[밴마철] 헤겔 이야기는 다 몰아서 할 예정이지만 지금 키에르케고르 니이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올렸던 것이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다시 한번 올리겠습니다. 동영상 보시기 전에 미리 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생각해 보지요. 우리가 고등학교 때 수학의 어려운 미분 적분 같은 것 배웁니다. 그리고 물리에서 만유인력 같은 것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하는 한탄이 이런 것 배워서 실제 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이런 것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 없다. 그런 말들을 합니다. 헤겔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만유인력 이런 것 생각해 보면 매우 추상적인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과학자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만유인력을 진짜로 이해한다면 아인슈타인 처럼 그것의 모순도 지적해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주 추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과학적 앎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추상적인 법칙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는 그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는데 단지 마찰력이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물건들이 원래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힘을 주니까 움직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자기 기운의 확장입니다. 자기가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기운을 뺏아 와 자기 기운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생명 욕구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앎이 추상적 과학적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자기 생명 욕구의 실현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앎이라는 것이 자가의 피와 살이 되어서 생명의 욕구실현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앎이 물리학적 법칙이 아닌 생물학적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물학적 힘의 표현하는 것을 의식consciousness 이라고 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욕구의 추구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자기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홉스의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 떠 오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자기 의식을 실현하려고 하지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의식을 주인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것은 자기 의식의 힘들이 만인대만인의 형태로 대결하는 싸움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 싸움에 지면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그렇게 만인대만인의 싸움을 벌이면 다 죽는다는 공멸의 위기의식를 생각할 줄 아는 동물입니다. 헤겔은 이것을 이성reason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결국 공존의 원리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보면 자기 의식이 강한 힘있는 사람으로 주인이 있고 그 힘에 억눌려 위축되어 그 주인에 봉사하고 사는 노예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을 주인과 노예의 투쟁이고 그 투쟁을 통하여 결국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 이성reason이고 그 공존의 결과물이 자유인 것입니다. 자유는 공존의 길이고 이것이 계속 발전해 나가 궁극의 절대정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어려울 수 있으나 미리 홉스의 만인대만인의 투쟁을 염두해 놓으시면 한결 이해가 쉽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lCEvRxJ2upE&si=tiV2P8nGf5g5uLKv
https://youtube.com/watch?v=FSRLabzwWU0&si=2k5Db7IajNid48xt
예전에는 아래에 있는 것만 올렸습니다. 위에 있는 것 어려우면 아래에 있는 것만 보아도 됩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중에서서 “ 나 속에 있는 우리” “우리 속에 있는 나” 라는 뜻만 이해하셔도 돕니다. 공존의 길이고 공적자유의 길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 민족주의나 맑시즘의 공산주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의 나라는 것은 결국 나라는 것이 사회라는 유기체의 속의 작은 요소 혹은 부품으로 전락되기 딱 좋은 것입니다. 즉 전체주의 사회 모델로 가기 쉬운 것입니다.
이전에 헤겔은 칸트철학을 수영장 밖에서 수영의 방법만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고 헤겔 자신의 철학은 수영장 속으로 뛰어들어 실제로 수영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칸트는 이성을 순전히 논리적 추론으로 초월적 구조에서 그것을 밝히려고 했고 해겔은 지금 삶의 현장에 뛰어 들어 주인과 노예의 싸움 속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논리를 보면 과학적 객관적이 지식이 삶의 현장의 지식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이성적 지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추상적 과학지식—주관적 자기의식—이성적 공존지식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추상적 과학적 지식은 객관주의objectivism 이라고 할 수 있고 주관적 자기 의식의 지식은 주관주의subjectiv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성적 공존지식도 큰 틀에서 객관주의objectiv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헤겔에서 실존주의가 무엇인지라는 문제의식이 드러난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subjectivism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성적 객관주의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옳으냐 틀리냐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칸트에게서도 초월적 통각에서 불교의 무아 비슷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자유를 자기 원인성으로 이야기할 때는 실존주의로 나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정치적인 공적 자유로 나아간 것은 당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와 헤겔이 살았던 시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그 자유정신을 유럽에 전파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칸트와 헤겔은 그 프랑스의 자유 정신이 한 없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은 여러나라로 분열된 봉건체제에 있었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 부러움을 정신의 관념으로 녹여 낸 일종의 정신승리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헤겔이 나폴레옹을 보고 저기 세계정신이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다고 한 말은 매우 유명합니다. 아래에서 올리는 글 다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올려 봅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54139
‘세계정신’‘의지’ 뛰어넘어…새 세상 향한 출발 시도가 희망 | 중앙일보
전쟁과 잔인함으로 가득한 인류 역사가 언제나 이성과 자유로 향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어린 시절의 꿈, 사랑하는 연인들의 희망, 아이의 행복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부모 … 헤겔식 정신에
www.joongang.co.kr
[Jack Shin] 듣기가 불편하네요.
...주인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노예는 주인을 위해 존재한다...
밥그릇 법칙에 의해 노예는 주인의 밥그릇에 노동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노예가 자각을 해서 주인이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 생존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실제 주인임을 깨닿는다...ㅎㅎ
니체의 말처럼 힘의 의지에 의해 노예가 주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신이 실제 주인임을 자각한다는 것은 좀 인정하기 힘드네요.ㅠㅠ
전체를 위한 공적자유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하는 사적자유는 변증법 보다 중도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문명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하느냐? 문명이 손상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존중해야 하느냐..
인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은 전자를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에게는 개체보다 종 전체의 존속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제레드 다이아몬의 입장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인권이고 전쟁이고 간에 환경파괴와 인구증가로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이 백년도 안남았다고 볼테니까요.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동영상을 보니,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개념의 자기 전개 등을 통해 변증법적 방법론이 왜 등장하게 됐는지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적자유와 사적자유,개인과 국가,이상과 현실 등의 대치되는 두 세계를 이어주기 위해 나타난 역동적인 방법론 같은데, 중도사상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헤겔의 철학이 가장 현실과 부합하는 사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