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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목.칸트.Subject.Subjectivism.이성주체.위버멘쉬.부채의식.

마철방 2024. 1. 3. 03:05

[밴마철]  Subject 문제 잘 지작해 주셨습니다. 원래 subject는 아래로 라는 뜻을 가진 sub와 던지다 누르다는 뜻을 가진 ject가 합해 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종시키다는 뜻도 있고 복종당하다 예속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명사가 되었을 때는 주어 주체도 되지만 왕의 통치를 받는 신민 백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이성주체라고 하면 어떤 초월적 원리에 의해 통제를 받는 주체라는 다소 모순적 개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이성주체 라고 하면 보통 칸트와 헤겔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해듯이 칸트의 순수이성은 초월적 원리에 의해 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 하면 초월적 원리에 통제를 받아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실천이성은 정언명법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이 되게 하라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의해 통제를 받고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 같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초월적 원리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역사가 흘러가는 운명적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별적 인간은 그 법칙에 의해 조정받고 통제되는 꼭두각시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떤 초월적 원리에 의해 통제 받아 다 같이 가야하는 방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버리고 평균적 인간이 되자는 뜻을 가지게 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감옥 같은 울타리에 같혀 사육되는 짐승과 같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것이 실존주의로 그 초월적 원리를 부수고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이런 초월적 원리로 부터 벗어난 개인을 주체화된 주관주의subjectivism이라고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할 줄 만 알아도 큰 성과입니다.

 

[오전 7:11] 니이체 철학은 한마디로 이 초월적 원리를 망치로 부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육장의 울타리를 해체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들으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에 대해 가르친다.

초인은 대지(大地)의 뜻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초인은 대지의 뜻이라고 말해야 한다.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사후세계의 희망에 대하여 설득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경멸하는 자들이며, 대지가 가장 싫어하는 죽어 가는 자이자 독을 자청하여 물려받은 자들이다.

대지는 이런 자들에게 지치고 권태를 느낀다.

예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으므로 이 죽음과 함께 이 모독자들도 죽었다.

이제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 가장 두려운 일이며, 그리고 불가사의한 존재의 심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밴마철]   [오전 7:19] 하늘의 원리로 희망고문하는 자들을 독을 뿌리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는데서 섬뜩함을 느낍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희망고문이라는 말 들 많이 하지요. 그만큼 니이체 철학이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 와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을 늘어 놓는 꼰대가 바로 천상의 논리 초월의 논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대지라는 것은 초월이 아닌 내재되었다는 뜻입니다. 초월은 선과 악처럼 외부에서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미 정해진 원리들입니다. 반면에 대지의 내재는 자기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감정을 통해 자기가 자기를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Übermensch: determine your own values

 

Übermensch: human become God

 

You have your way, I have my way. As for the right way, the correct way, the only way, it does not exist.

 

[오전 7:27] 개인적으로 이보다 명확하게 위버멘쉬를 정의하는 것이 없어 영어로 된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오전 7:30] 이런 것을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전에 말했던 마담 B 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전 7:31] https://youtube.com/watch?v=4lHZR5lR0No&si=wl1am6X7bGulfG6_

 

우선 국경 boundary 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대지 자체에는 바운더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떤 초월적 논리로 의해 설정된 것입니다. 어떤 여자 한의사 탈북민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는데 탈북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자기는 이북에서 다른 사람보다 교육도 많이 받고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북한에 사는 일반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로서 양심이 강하였는데 이 양심을 깨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중국 친척집에 식량 구하러 와서 탈북 권유를 많이 받았는데 탈북하지 않고 돌아갈 것만 결심하다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3년 이후에 탈북했다고 합니다. 그 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던 탈북자는 고등학교 정도만 나온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그런 양심의 거리낌 같은 것은 거의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서로 웃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동전의 양면입니다. 한편으로 정보의 량을 늘려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육의 울타리를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니이체는 이것을 부채의식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기 의식으로 내면화 시키는 것입니다. 좀 더 말하면 역사의식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역사에서는 민족에게 빚을 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적 역사법칙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을 심화시켜 스스로 그 법칙에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초월적 원리에 스스로룰 가두는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탈븍해서 보니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이 노예로 살았는가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보고 니이체가 바로 떠 올랐습니다. 

 

 

마담 B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한 남편과 살아야 하고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이런 것이 일종의 초월적 원리로 선과 악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법을 다시 보면 네 의지의 준칙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자기 맘대로 자기 마음이 이끌리는대로 남편을 바꿔치기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이 승인하는 그런 양심은 아닙니다. 이 영화보면 중국남편을 한국에 잠시 데려와 방 얻어 살면서 두 집을 왕래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자기의 좋고 싫음으로 자기가 자기의 양심의 법칙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선과 악의 이분법은 이 마담 B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성authentic 입니다. 니이체는 스스로 자기 철학은 비도덕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을 기준으로 살지 않고 자기의 좋음과 나쁨으로 사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말 나쁜 것인가? 이런 것을 묻습니다. 이런 니이체의 영향을 받은 라캉은 칸트가 더 윤리적인가? 희대의 바람둥이 사드백작이 더 윤리적인가?를 묻습니다. 칸트는 남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가득찬 것이고 사드 백작은 모든 여자들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대했다고 하면서 칸트보다 사드가 더 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오전 8:38] 저기 위에 올린 낙타 —사자—어린아이에서 낙타가 지는 짐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부채의식입니다. 천상의 초월적 원리에 의해 규정된 선과 악을 자기의 내면으로 내장시키는 것이 부채의식입니다. 탈북민 여 한의사처럼 하나라도 더 배운 내가 불쌍한 북한 인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식입니다. 

[밴마철] [오전 8:43] https://youtube.com/watch?v=PKi5cyz7tpg&si=RJAZXx6-gOUxjvgV

 

[밴마철] [오전 8:49] 북한 한의사가 스스로 졌던 부채의식의 짐이 허구였고 그 허구의 짐이 삶을 힘들게 했다는 자각이 낙타에서 사자로 가게 합니다. 내일 사자 얘기 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