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 일.왕양명.양지.이탁오.푸코.에스피테메.권위주의.공자
[밴마철] [오전 6:25]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주셨네요. 양지를 절대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자학들이 양명학을 인기위리(認氣爲理)라고 비판합니다. 인기위리는 기를 리로 오인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뜻은 개인적 사사로움은 자기 감정인 기반인 기를 초월적 절대선인 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왕양명의 양지에는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대학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 “ 이른바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성의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악취를 싫어하고 예쁜 여자를 저절로 좋아하듯이 …왕양명은 대학의 이 구절로 자신이 주장하는 양지설의 핵심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보면 자기 자신의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도덕적 기준을 삼겠다는 뜻입니다. 격물치지를 통해서 얻어진 어떤 외부적 원칙에 근거해 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면의 좋고 싫음으로 선괴 악을 구분하겠다는 뜻입니다. 주인도덕으로 자기의 좋고 나쁨으로 도덕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뜻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외부적 원칙으로 주어진 선과 악을 따르는 것은 노예도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니이체의 기준으로 보면 주자학은 일종의 노예도덕이고 양명학은 주인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왕양명은 모든 성인의 말씀은 스쳐지나가는 그림자에게 블과하고 나의 참된 스승은 오직 내 마음 속 양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현의 말씀이 기독교의 성경과 같은 것이고 일종의 초월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직 내마음 속의 양지라는 것은 철저하게 내재된 것으로 니이체가 말하는 대지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32] 하이데거와 니이체의 관계를 거칠게 비교해 보면 왕양명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전기 사상은 자기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신의 존재근거인 양지를 찾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계승한 학파를 귀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신비주의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후기사상은 이것을 버리고 치양지설로 간 것인데 양지를 치열함 속에서 외부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양지현성파라고 하는데 왕용계가 주장하였고 이것을 계승한 이탁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이탁오는 정말로 니이체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습니다.
[밴마철] [오전 6:33] https://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88358
나는 한 마리 개였다 - 제주환경일보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는 중국 명나라때 천주(泉州) 진장(晉江),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출신이다. 윈난성(雲南省) 야오안(姚安)의 지부(知府)를 지냈으나 54세에 관직을 떠났으며, 중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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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마철] [오전 6:40] 글이 좀 긴데 읽어보니 중국학자가 쓴 걸 발췌 번역했다고 하네요. 잘 쓰여진 글입니다. 이 이탁오와 니이체의 비교연구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탁오는 궁극적으로 어린아이 마음인 동심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니이체가 위버멘쉬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과 흡사한 것이 많습니다. 참고로 이탁오는 중국에 온 선교사 마테오리치를 만나 토론도 하였는데 그 기독교 사상이 자기에게는 안 맞는다고 하며 이별을 통보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밴마철] [오전 6:48] 왕양명의 후기 사상과 그것을 계승한 사람들의 논리에는 자기의 생명욕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것을 인욕을 천리로 오인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기를 리로 오인했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6:57] 니이체의 글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차 있으나 그것에 대한 정교한 논리는 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니이체의 아이디어를 정교하게 한 사람들이 푸코 데리다 라캉 들뢰즈입니다. 이것 다 할 수는 없고 선악의 이분법의 극복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니이체의 근본 뜻이 드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푸코를 좀 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니이체가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에 강한 필을 받은 것이 푸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절대적인 원리로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선과 악은 없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했지만 푸코는 이것을 진리 기준 에피스테메 라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이스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에피스테메가 있었지만 기독교가 성립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하여 금지시켰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진리기준이 항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주체subject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근대를 밧어나는 탈근대의 포스트모던의 에피스테메는 주체화subjectivity 라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드렸지만 subject는 초월적 원리에 의해 규제 통제를 받아 인간의 평준화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습니다. 칸트의 순순이성 실천이성 헤겔의 역사이성 같은 것에 통제되어 뭉쳐서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니이체와 같이 그런 초월적 원리를 부정함으로 함으로 각자가 각자의 개성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주체화subjectivity 입니다. 이렇게 에피스테메가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피스테메가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점에서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그 비판의 초점이 잘 못맞추어 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경일의 논리대로 하면 공자부터 지금까지 단일한 하나의 에피스테메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유학사상이 쓸데없는 권위주의를 만들어 우리사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인데 저는 그런 권위주의가 반드시 공자에게 기인했다기 보다는 근대라는 시대에서 오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라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보통교육입니다.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똑 같이 만들어 똑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결국은 보편적 원리들에 대한 복종과 존경입니다, 법에 대한 카리스마 자연과학의 법칙들에 대한 카리스마를 익히는 것이지요. 막스베버는 유교사회가 자발적으로 근대로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권위주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주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인간을 영혼없는 전문가 쇠우리에 갖히는 인간을 양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자를 가르치지 않고 공자를 배척하는 교회에는 권위주의가 없는 것입니까? 오히려 요즘 유교가 다 사라지고 있는데도 권위주의가 있는 것은 그 권위주의가 근대화 과정에서 온 것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라는 것은 초월적 원리에 의한 권위주의가 없으면 성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8:06] 근대의 징표가 기차 신문 보통교육입니다. 기차가 나타남으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쉬어 지면서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차를 통해서 신문이 배달되면서 같은 정보를 공유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없던 시절에는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모릅니다, 빨라야 한달 뒤에 늦으면 몇년 후에 ..소학교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는 서당교육이 있었은데 가르키는 커리큘럼이 통일되지 못하고 서당훈장 선생님 맘대로 였습니다. 기차 신문 보통교육이 나타나면서 같은 바운더리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공동체로 민족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밴마철] [오전 8:11] 뭐 제사문제로 유교를 비판하는데 그럼 기독교에서 헌금 등을 받치며 봉사하는 것은 문제가 안되나요? 요즘의 문제는 제사의 권위에 억눌리는 것보다 교회의 권위에 억늘리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밴마철] [오전 8:23] 권위주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에는 동감을 표할 수 있지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제 의견으로는 …
[Jack Shin] [오전 9:18] ....이지의 숭고한 인격과 남을 뛰어넘는 재능에 대한 믿음과 복종, 그리고 일종의 깨달음을 묘사하면서, 인생은 아주 잠깐으로, 오직 천기를 받고 지기를 얻은 뜰 안의 꽃처럼 피어나야 할 때 스스로 깨달아 활짝 피어야만 삶을 그르치지 않고 웃음을 머금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탁오가 뛰어난 인물이고 용기있게 당대 시류를 비판했다 하더라도, 숭고한 인격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지...
그저 동양에서는 위인전을 쓰는 듯한 문필가들이 넘쳐 남니다. 간신 아니면 충신, 군자 아니면 소인...성인 아니면 필부... 보통 사람이 없어요 ㅠㅠ
[Jack Shin] [오후 12:30] 안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지금껏 유교 경전을 비롯한 동양 고전들이 숭상을 받아온 만큼, 비판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청동기 농경시대에 쓰여진 동양 고전들 중에 좋아하는 구절들이 있기는 하나, 현대에 적용해서 받아들일 내용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하나마나한 내용이거나 너무 단순하게 세상을 보는 생각들에 대부분,,,,
그저 그 시대에 그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정도이고, 지금의 생각들의 시작이 이렇구나,,, 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보려고 합니다. 절대 무시하지는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