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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목.스피노자.코나투스.에펙투스.감정.정동.니체.몸의철학

마철방 2024. 1. 11. 11:49

[밴마철] 어제 했던 affectus에 대한 좀 더 보충하겠습니다. 다음 동영상 한번 보고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bfxJr5iE7jY&si=w1l8pTYdbjm_75Om

 

무슨 생각이 드신가요. 사실 스피노자가 겪었던 당시 네달란드 상황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의회파 국왕파 유태인파 캘빈이즘파가 나뉘어 분열하여 서로 간의 선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affectus의 기본적 뜻은 외부의 자극에 의한 “신체적 변용”이라는 뜻입니다. 촛불파는 날뛰며 기뻐합니다. 태극기파는 풀이 죽어 슬퍼합니다. 기뻐하는 것은 몸의 변화 즉 신체적 변용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것 또한 풀이 죽는다는 몸의 변화 즉 신체적 변용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펙투스는 신체적 변용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생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동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신체적 변용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정서라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 디마지오는 이것을 감정emotion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emotion은 움직이게 하다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신체적 변용이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체적 변용과 함께 나타나는 기쁨의 affectus는 바로 자기보존의 conatus를 증강시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체적 변용과 함께 나타나는 슬픔의 affectus는 conatus를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슬픔의 에펙투스가 좀 더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affectio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affection입니다, 영어로 살펴보면 affect는 영향을 받다 혹은 영향을 주다는 뜻인데 affection은 애정이라는 뜻이 있지요. affect가 구체화되면서 생겨나는 feeling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디마지오는 이 affectio 혹은 affection을 feeling이라고 한 것입니다. 

 

느낌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희망에 찬 밝은 느낌이라는 것은 결국 기쁨이라는 감정(affectus)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affectus)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다양한 느낌은 결국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감정(affectus)인 기쁨과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감정(affectus)인 슬픔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좋음과 나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하면 호오(好惡)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는 좋아한다는 것이고 오는 싫어한다 나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느낌을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의 일곱 가지로 말하는데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바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모두 호오 두 가지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 뜻을 갖느냐 하면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것은 선이고 코나투스가 감소되는 것은 악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필연적 원리로 외부에서 정해진 것이 아니고 내부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에펙투스와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에펙투스에 달려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니이체가 말하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만인을 위한 선과 악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자기의 좋음과 나쁨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양명의 양지설과도 비슷합니다. 양지는 호오(好惡)이다고 하여 선을 좋아하기를 예쁜여자를 좋아 하듯이 하고 악을 싫어하기를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하라는 것의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디마지오의 논리를 따라 감정emotion과 느낌feeling을 구분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써온 용어에 막대한 지장이 있고 헥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다음의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몸에 받는다 반대로 몸에 안받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몸에 끌린다 몸이 거부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몸에 끌리는 것이 기쁨이고 좋음입니다. 몸이 거부하는 것은 슬픔이고 싫음이고 나쁨입니다. 이것이 어펙투스입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여러가지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여도 내 몸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싫다고 해도 내 몸이 끌리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스피노자 니이체 왕양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복잡하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코나투스는 내부에너지 혹은 내부의 기운입니다. 에펙투스는 외부에네지 혹은 외부 기운입니다. 이 두 에네지가 만나면서 다양한 느낌 혹은 감정(안토니오 디마지오 논리애 따르면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 이 생긴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느낌을 두가지로 구분하면 내부기운을 키워주는 것이 있고 내부기운을 꺽는 것이 있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기운과 외부의 기운이 서로 만남이 우리의 삶이라고 보면 정치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위의 동영상 촛불부대와 태극기부대에서 보듯이 그런 정치적 환경이 우리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와도 영향을 받기도 주기도 합니다. 사실은 후자가 더 크지요. 그러면서 어떤 것을 혐오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이런한 상황들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에펙투스의 이론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현대사회를 살펴보면 이 말에 일리가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그 연구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이성)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몸(감정)이 받아 들이지 않고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펙투스 이론 니이체의 몸의 철학은 이런 뜻을 같습니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몸이 이 세상을 해석하는 근원이라고 합니다. 초월적 이성이 아니고 그런 몸이 이 세상의 해석의 근거이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 의한 해석만 있다는 관점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쟈스민저같이 무식한 사람도 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시는 안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제 폴 틸리히의 존재 신비주의에 대한 올려주신 20쪽이 넘는 글을 저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내용이라 간신히 끝까지 읽기는 하였으나, 장황한 말들 속에 내용을 추려내느라 엄청 피곤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시는 안선생님에 대한 새삼스런 고마움이...^^

스피노자와 니이체가(왕양명까지) 어떤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지 쉽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번 해주셨지만 코나투스와 어펙투스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글들 읽으면서 마침내 Subjectivism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만인이 만인의 각자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다양성이 안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제가 바라보고 싶은 지점, 그러면 남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해야하나, 윤리나 정치와 개인을 어찌 설명하는가 그런 점에 대한 설명이 기다려집니다. 

 

[Jack Shin]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갑니다.  몸이 끌리면 나의 코나투스에 부합되는 것이고 아니면 맞지 않는다는 간단한 이론인데, 이것이 선과 악에 결부되면 나의 코나투스가 이것을 결정하는게 되는 건가요? 좀 극단적인 생각인가요?

 

[쟈스민저도 궁금한 문제입니다. 

칸트 철학에서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욕망이 니이체 이후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 이르면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게 지금까지의 공부인데...

특이하게도 스피노자는 욕망의 윤리를 다루었다고 하니 코나투스가 선악구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신선생님 문제제기로 궁금해집니다. 

사실, 자기의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왜곡되어 억압받고 있는 게 대부분의 현대인같기도 합니다만.  어떤 내용으로 답주실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