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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금.니체.스피노자.트럼프.코나투스.안토니오다마지오.생성.소멸

마철방 2024. 1. 11. 12:06

[밴마철] 두 분의 의견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현대철학을 이해하는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공부방 논의가 정말로 잘 굴러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기존의 논의를 통해 이미 감을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멋진 말을 외우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논의의 흘러가는 방향을 스스로 포착하는 능력의 배양이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공부방 논의가 잘 굴러가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굴러 갔으면 좋겠습니다. 

 

몇년전에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니이체가 나타났다고….트럼프 보면 제 맘대로 힘을 구사하려고 하는데서 니이체를 연상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니이체 연구자들이 트럼프 현상에 대한 코멘트가 많았습니다. 보통 니이체 철학은 황제와 같은 독재자로 부터 길거리 거지까지 다 통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들 합니다. 그 때 미국의 니이체 연구자들은 트럼프의 승리도 니이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결국에 트럼프의 몰락도 니이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북한이 왜 독재체제로 남아 있을까요? 니이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결국은 김씨 독재체제는 끝납니다. 트럼프가 승리했지만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이 많은 한에 그런 트럼프 체제는 얼마 못 갈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히틀러는 그의 독재에 헤겔과 니이체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니이체를 평생 돌보아 주던 누이동생의 남편을 끌어 들여 니이체 철학으로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로 보면 헤겔과 니이체는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것입니다. 니이체는 바그너를 깊이 믿고 따랐지만 결국은 서로 결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그너가 헤겔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사상은 목적론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철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을 앞서 우리는 황장엽의 수령론 같은데서 보았습니다, 앞으로 좀 더 논의하겠지만 니이체 철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목적론에 반대하며 개별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니이체 철학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니이체 말을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생리학자들은 자기보존의 충동을 유기적 존재의 근본충동으로 정립하려 숙고한다. 무엇보다도 어떤 살아있는 것이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 - 삶 자체는 힘에의 의지다 자기보존은 단지 그것의 간접적이고도 가장 흔한 결과일 뿐이다. [...] 불필요한 목적론적 원리를 조심하라!

 

힘의 의지가 스피노자의 자기보존의 코나투스와 관련이 있고 거기서 반목적론적 입장을 취하라는 것인데 목적론과 반목적론은 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서 들뢰즈 할 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코나투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이 생깁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이야기 한 사람이 안토니오 다마지오입니다. 그 안토니오 다마지오를 통해서 코나투스를 좀 생각해 보지요. 

 

여기서 학문적인 디테일함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대체적인 얼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셔서 우리 몸의 에네지를 만듭니다. 그 에네지의 정수의 일부가 호르몬이 됩니다. 이 호르몬이 간뇌로 올라갑니다. 거칠게 말하면 여기까지를 코나투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오는 에네지로 에펙투스가 있습니다.  이 코나투스와 에펙투스를 만나는 장소를 간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용하고 고요한  호수와 같은 코나투스에 에펙투스라는 돌이 던져집니다. 그러면 호수에 파장이 일어납니다, 이런 파장이 감정을 만들고 대뇌에 있는 기억등의 이성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 때 거기서 야기되는 것이 느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파장은 사그러들면서 간뇌에서는 다시 그 조용하고 고요한 평형상태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항상성(homeostasis). 자동적으로 평형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배선생님이 올리신 동영상을 보면 이런 이야기도 구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간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그 항상성이 몸 전체 구석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이체의 생성과 소멸을 이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이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성의 의미는 모둔 순간에 충족되고 도달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니이체 철학을 생성의 철학 혹은 생기존재론이라고 합니다. 이 생성은 다시 소멸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생성이 일어나고 소멸하고 …결국은 생성은 일종의  항상성같은 것으로 충족되고 완성된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소멸되고 또 다시 항상성 같은 것에 도달하려는 생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고찰하면 생성의 총체가 갖는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고찰하면 그 에너지는 영원한 회귀과정 안에서 정점에 도달하며 그 정점에서 다시 하락한다: 이 힘에의 의지 는 해석 안에서, 힘 소비의 양식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이야기는 결국 자연은 자가 치유력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니이체의 철학을 자연치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많습니다. 앞서도 두 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니이체 철학의 등장 배경은 바로 칸트와 헤겔입니다. 만인을 위한 선 혹은 역사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는 이성주의에 반발로 니이체 철학이 탄생한 것입니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그것이 평형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반작용이 있는 것이지요. 칸트 헤겔은 절대적으로 틀리고 니이체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한번 했지만 하이데거는 자기 거실에 노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써놓고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신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 그 자체가 스스로 그런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 자체에 항상성을 찾아가는 그런 것처럼 자정능력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이점에서 니이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연에 이런 자기 자정능력 혹은 자동으로 평형을 찾아가려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코나투스도 이런 것이 아닐까 힘의 의지도 생성과 소멸을 통해서 이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것은 뒤에서 목적론과 반목적론으로 진화론을 이야가 할 때 더 해 보겠습니다. 

 

[쟈스민]  감정도 이성도 아니면서 인간에게, 자연에게 깃들여져 있는 자정능력, 이것을 저는 영성이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Jack Shin] 니체의 말은 좀 부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성의 의미는 모둔 순간에 충족되고 도달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 "생성의 의미는 어떤 순간에 충족되고 도달되고 완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의식과 같다고 봅니다. 의식도 에펙투스에 의해 자극을 방아 생성되었다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나면 코나투스 혹은 항상성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 것이죠.

 

의식이란 어떤 뇌의 어떤 특정 부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시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박문호가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성의 개념도 있고 항상성이 있어서 자연이나 개인, 사회 등이 자정능력, 혹은 자연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틀에서 살아남은 종에게만 항상성이나, 자연치유력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밴마철] 예 맞는 말씀입니다. 이 글 바로 아래에 있는 생성은 상승했다가 정점에 이르러 다시 하강한다는 말도 니이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 신선생님 처럼 하는 것이 적절한 니이체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약육강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것은 좀 잘못된 것입니다. 다윈에 앞서 스펜서라는 사람이 있어 사회는 약육강식처럼 발전한다는 사회진화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원의 적자생존은 반드시 약육강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자체를 보면 다양성입니다. 아주 작고 힘없는 것들도 나름의 최적의 생존방식을 찾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진짜 약육강식의 형태로  진화가 이루어졌다면 세상에는 작고 약한 것들은 없어져야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 예능프로 survivors 를 즐겨 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 취지가 다윈의 진화론을 잘 묘사한다고 여겼습니다. 가만 보면 강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 살아남아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힘을 모아 배척하여 탈락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 때 보았던 것 중에 인상깊었던 것은 40대 후반의 여자 분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을 보고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다윈의 적자생존은 최대 최고가 아니라 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가장 잘 맞는 것. 그럼으로써 항상성이 최적의 상태를 찾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희가 김정현의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를 pdf파일로 돌려 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니이체 철학을 일종의 자연치유학으로 봅니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미국에서도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Reply to 쟈스민... [밴마철] 예 저도 동감합니다. 서양의 경우 신의 모습이 바뀌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계율를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신, 로마시대에는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규범을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신, 근대에와서는 과학의 원리로 신 이신론 훅은 sleeping god 가 그런 것이지요. 현대에 와서는 존재에 대한 신입니다. 존재는 바로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자유라는 뜻이지요.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신. 폴 틸리히가 말하는 신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여기에는 니이체의 심연abyss, 즉 근거없는 근거 ground of groundless 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것이 동물과 초인 사이에 있다고 한 것은 이성적인 것만도 아니고 순전히 감성적인 것만도 아닌 것이라는 뜻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심연으로 오는 자유는 신비적인 모습이 있을 수 있고 항상성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적 같은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고 어디까지나 유한성의 안에 있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