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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8 금.스피노자.마수미.정동철학.코나투스.에펙투스.실체.연장.감정.올리버색스.안토니오다마지오

마철방 2024. 1. 14. 08:07

[밴마철] [오전 6:01] 어제 하던 스피노자에 대해 좀 더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것 좀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스피노자를 정신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성주의자가 되고 몸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감성주의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코나투스에 중심을 두고 그 코나투스의 움직임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고 보면 헤겔주의자가 됩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내재된 필연법칙이라는 것을 그의 역사법칙으로 끌여드린 것입니다. 헤겔에 반대하던 니이체는 이런 것을 보고 니이체는 스피노자가  모든 것이 내재되었다는 범신론에 공감을 하지만 그것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고 한 것을 크게 비판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폐병쟁이의 헛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스피노자가 안경 알 깍으며 유리가루를 많이 마셔 폐가 안 좋았다는 것을 염두한 것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스피노자 후기 철학를 보면 몸과 에펙투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것은 니이체 철학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대에는 스피노자를 헤겔적 관점이 아니라 니이체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우리 캐나다가 자랑하는 철학자 몬트리올 대학의 마수미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스피노자 니이체 들뢰즈를 계승하여 정동 철학을 펼치고 있습니다.앞서 affectus를 정서 감정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는데 마쓰미는 여기에 프로이드적인 무의식의 충동(drive)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마수미의  의견대로 하면 affectus는 정동이라고 번역되는 것입니다. 하여간 제가 앞으로 마수미를  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그에 대한 논문 하나 읽었는데 그 초록 공유합니다.

논문 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동의 잉여적 사유들 -브라이언 마수미 논의를 중심으로

Surplus causes of Affect -Focusing on Brian Massumi-

 

우리는 이제 정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동(affect)” 그 자체에 주목한다. 정동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속하면서 정동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거쳐 마수미에 이르기까지 정동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명료해지고 있다. 마수미는 정동이 감정의 영역을 넘어 지각되는 대상과 무의식의 영역까지 아우를 것이라고 기대한다. 마수미는 『정동정치』를 통해 정동을 학문이 아닌 삶의 차원에서 고찰하고,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의식들을 찾아내고 있으며 이 발견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질을 찾고자 한다. 마수미는 정동을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운동으로 비유하며, 정동이 정치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을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정동이 마주침이라는 마수미의 주장은 문학에서 정동이 구체화되는 양상으로 희망, 기억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정동의 관점으로 희망을 볼 때, 희망 그 자체의 의미를 보기보다는 희망으로의 이행에 초점을 둔다. 희망을 바라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결국 희망의 전 단계에는 슬픔의 정동이 자리 잡고 있다. 슬픔의 정동이 기쁨의 정동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 문턱을 넘는 순간 희망이라는 관념이 생성되며, 이 생성의 과정에는 희망의 고유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 원인도 포함된다. 기억도 희망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단순한 이미지로 그리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불러올 때 정동과 함께 발현되며, 정동을 통해 과거-현재-미래의 무경계적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정동은 기억의 양태에서 일종의 혼합물이자 계속해서 축적되고 움직이는 정동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윤리는 웃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수미는 웃음을 일종의 “난입”으로 보고 있지만, 웃음은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일련의 힘으로 작용한다. 웃음은 가장 실천적인 영역으로 모든 대상에게 평등을 보장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숭고한 정동의 양상이다. 웃음은 유희가 아니라 극단의 가치를 껴안고 상황을 비틀 수 있는 행위이자 감정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또한 웃음은 문턱을 넘는 실천적 행위가 될 수 있으며, 모든 기억을 공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정동의 양태로도 볼 수 있다. 마수미의 여러 정동적 시선을 통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들을 창조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희망, 기억, 웃음 외에도 정동은 모든 영역에서 ‘받아들임’을 실행하고,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떤 단면에 쏠리지 않고 균형을 이룸으로써 만들어내는 찰나의 해방과 일시적 평등은 정동을 통해서 도달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로 마무리된다.

 

[오전 6:06] 스피노자 니이체를 좀 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감을 잡으실 수 있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 있다가 피 검사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좀 일찍 울렸습니다. 

 

[오전 6:27] 스피노자가 코나투스에서 에펙투스로 그 중심이 이동한 것에는 정치신학으로 와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태양이 밀납을 녹이고 진흙 반죽을 굳게 만들듯이 어떤  외부의 자극이 신체를 변용시키며 그것으로 인해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성적으로 살아가느냐 감성으로 살아가느냐에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초기 이성 중심적 사고에서 감성중심적 사고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태양을 봅니다. 그것은 한 쟁반만한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멀리 있다고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감성적 사고 입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태양은 지구보다 몇배나 크고 멀기도 엄청 멉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할 때 태양을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으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일생생활에서 감성적 사고가 우위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국은 에펙투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쟈스민]   [오전 9:12] 저는 이 말이 들을 때마다 갸우뚱해집니다. '정신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성주의자가 되고 몸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감성주의자가 된다'

스피노자는 뚜렷한 철학적 특징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일원론을 주장했던 건데, 여기서 또 정신과 몸을 나누어 접근하면 그의 철학을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죠.

이원론의 극복은 참으로 말처럼 쉽지 않구나~를 느낍니다.^^

 

이 말을 연장해 생각해보면 자유와 필연성은 대립적인 개념인가 통일성을 갖는 개념인가 입니다.

자유와 필연성의 통일을 저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이 될까요. 그러나 니이체로 기울여져서도 안된단 생각.ㅎㅎㅎ

 

[밴마철]  [오전 9:51] 예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하나라는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정신은 육체의 하인이다 그런 말을 하는데 그것은 이미 둘이 나누어 진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 김재권 교수가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을 해석하며 정신은 육체의 활동에 부수되는 부대현상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이런 논리가 데까르트하고는 다릅니다. 데까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각각 다른 실체라고 봅니다. 정신은 비연장적 실체, 물질은 연장적 실체. 실체라는 말은 자기 독립적으로 다른 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정신은 물질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물질 또한 정신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체는 하나의 실체에 대한 두 양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정신이 욱체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주의자들은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쳐 육체를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감성주의지들은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오전 9:51] https://youtube.com/watch?v=JWncxDlMv1w&si=mhsaqklJmdmA5LrW

 

[오전 9:53] 스피노자의 에펙투스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정동과 같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장해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쟈스민]  [오전 9:57] 설명 감사드립니다. 

'확장해서 해석하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논의를 지켜보겠습니다.

 

[밴마철]  [오전 9:58]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완전히 니이체적으로 해석한 것이 정말 스피노자의 본의인가? 과장인가? 이런 논의는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위의 동영상의 정신분석가들과 같이 에펙투스를 무의식으로까지 확장해 해석하면 코나투스는 거의 의미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영상에서 방청객이 스위치를 누른다고 하는 데 그것이 프로이드에서 drive의 뜻입니다. 

 

[Jack Shin] [오전 11:01] 상세한 강의를 듣다보니 다마지오,스피노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사실 감정이 기억에 개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는데에도 깊이 간여한다는 것은 올리버 색스의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이론이 스피노자와 다마지오가 주장하는 내용과 같은 방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사진 속에 있는 인물을 보고 실물이 아니라고 판단해주는 기능이 바로 감정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아주 인상깊은 내용이었습니다.

어릴때 부터 감정을 자제하거나 버리라는 말을 수없이 듣던 저에게 감정이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준 계기가 되었죠 ㅎㅎㅎ

 

[밴마철]  [오후 4:12] 중요한 문제를 말씀해 주셨네요. 저도 이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하였는데…잘 아시다시피 올리버 삭스는 훔의 철학을 따라 그의 뇌과학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흄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근거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떤 것을 접촉하여 경험을 할 때는 반드시 그 육체가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좋고 나쁨이라는 감정이 개입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객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경험에서 오는 관념이 이성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한 측면에서 스피노자가 이성에 의해 객관적 필연적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극렬히 비판하면서 그를 독단주의dogmatism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감성이론을 발전시킨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흄과 똑 같이 정신은 몸의 노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칼 합니다. 

 

[오후 4:17] 흄을 계승한 올리버 삭스는 뇌에서 이루어진 관념의 발생에는 100%의 필연적 법칙 같은 존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환각hallucination같은 것에 연구를 많이 하였습니다. 반면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를 따르면서 뇌의 작동에 어떤 필연적 법칙이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점에서 올리버 삭스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성의 시대가 끝나고 감성의 시대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초월적 원리 같은 것에 의하여 감정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낡은 유물로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가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스피노자는 이성주의자로 분류되었습니다. 대부분 철학가들도 이렇게 파악했습니다.,그러나 들뢰즈 안토니오 다마지오에 와서 비로서 스피노자가 감성주의로 파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