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 금.종교.성리학.대월상제.제사.동학.향아설위.
[밴마철] [오전 6:55] 종교문제가 나왔으니 여기에 대해 우리 역사와 관련해 좀 더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성리학에서 심성수양의 핵심은 경(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이라는 것은 원래 외부 대상을 공경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 와서는 천명이 이미 자기 자신 안에 성이라는 형태로 내재되었다(천명지위성)것을 확신함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성이나 리(성즉리)에 대해 집중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에 대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단정히 하고 정화한다는 그런 뜻을 가집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 보지요. 좀 어려울 수 있으나 한번 읽어 보시면 나름 재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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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의 敬齋箴
正其衣冠 尊其瞻視(정기의관 존기첨시) 복장을 바르게 하고 눈빛은 존중하듯 하며 潛心以居 對越上帝(잠심이거 대월상제) 마음을 가라앉혀 하느님을 대하고 있는 듯하라. 足容必重 手容必恭(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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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潛心以居 對越上帝(잠심이거 대월상제)
마음을 가라앉혀 하느님을 대하고 있는 듯하라.” 대월상제라는 말의 뜻은 “상제를 대하여”라는 뜻으로 원래 시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시유교 은나라에서 조상신을 상제로 승격시켜 그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인격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 주자는 이런 인격신을 인정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자는 대월상제를 상제를 대하여 라고 해석하지 않고 “마치 상제를 대하듯이”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인격신의 상제는 없는 것인데 마치 있는 듯이 하여 외경스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뜻입니다. 실질적인 인격신으로 상제 하느님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과 그런 상제 하느님은 없는 것인데 마치 있는 듯이 생각하라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에 들어온 천주교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최제우의 동학은 “마치 상제가 있는 듯이“ 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상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상제에 대한 제사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교적 논리에서 보면 원래 하늘에 계신 상제에 대하여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만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미사를 보면 신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모양새를 취합니다. 이것은 황제가 아닌 사람이 황제처럼 하늘의 절대자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그것으로 부터 어떤 윤리적 계명을 이끌어 내는 것은 황제를 무시하고 부모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즉 국가나 가족의 윤리보다 하느님의 계명을 더 우위에 두는 행위로서 결국 국가나 가족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그것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사실 조선은 제후국으로 조선의 왕은 황제가 아님으로 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습니다. 단지 땅의 신인 사직 그리고 조상신인 종묘에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 온 천주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고 하니 해괴하며 국가나 가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동학의 시천주라는 말은 외부의 초월적 신인 상제를 내 마음 안으로 모신다는 것이지요. 천주교와 비슷하고 그럼으로서 전통적인 국가윤리와 가족윤리를 파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싹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처형한 것입니다.
조선의 왕도 하늘에 제사를 못 지내는데 하물며 최제우 같은 사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니 이것은 반란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최제우의 기본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상제를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의 경은 결국 종교적 외경심을 끌어내지 못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무지한 세상사람, 아는 바 천지라도 경외지심이 없었으니 아는 것이 무엇이며”(「도덕가」)
여기서 “아는 바 천지라도” 라는 것은 성리학적 격물치지를 두고 한 말입니다. 격물치지를 통하여 아는 것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지식이 자기 실존적인 절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님이 있다고 해야 거기에 대한 경외심이 제대로 발현되어 실존적 실천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최제우는 이렇게 초월적 상제를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천주교와 같이 미신적 상황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신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의 이치는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니겠는가?”(<용담유사> 「도덕가」)
초월적 상제가 하늘의 심판대에 서서 그의 생전 행위에 따라 천당과 지옥의 심판을 하는 것은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후세계를 염두한 천주교는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최제우는 성리학과 천주교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내세인 지금 여기에서 자기 정화로서 종교를 제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이 최시형에게 전달되어 결국 향아설위 그리고 정한수 이론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Jack Shin] [오후 12:11] 종교적인 시각으로 성리학과 동학, 천주교를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합니다...
특히 동학에 대해 약간의 맛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만,
.....
실제로 하늘님이 있다고 해야 거기에 대한 경외심이 제대로 발현되어 실존적 실천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 대목에서 키에르케고의 신앞의 단독자..로서 실존의 시작을 연상케 합니다만, 결국 하눌님의 경외심과 실존적 실천이란 양립할 수 없는 자가당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을 경외하면 그의 뜻을 낙타처럼 순종해야지 실존적 실천이 가능할까요?
[Jack Shin] [오후 12:18] 상제가 인격신이 아니라는 견해는 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행위록이나 내세의 심판론,천국론이 없어서 그렇지,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다든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든지 하는 내용을 보면,완전히 자연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굳이 비유적이라고 한다면 위에 나오는 신학교수도 기독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밴마철] [오후 12:33] 예 케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신과 동학의 상제는 정말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잘 지적하셨습니다. 상제는 인격신입니다. 다만 성리학에서 하늘은 필연적 이치임으로 인격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대월상제를 바로 상제에 대하여 혹은 상제를 마주하여 라고 하지 못하고 “마치(as if) 상제를 대하듯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리학에서 하늘은 천즉리입니다.